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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an 11. 2018

그저 손에 익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는 자기 측에만 있다고 여긴다. 자기와 다른 의견은 틀리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는 마치 안갯속을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다. 자기보다 앞서가는 사람도, 또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좌우의 사람들도 모두가 안갯속에 싸여 있다. 오직 자기 주위만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안갯속에 싸여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自敍傳)'-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은 송대의 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시문을 모아 엮은 문집이다. 그중 귀전록(歸田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북송시대에 진요자(陳堯咨)라는 명궁이 있었다. 송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에서 활 쏘기로 진요자와 겨룰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활쏘기를 즐겼다. 어느 날,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멋진 활 시범을 보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기름 장수 노인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요자가 화살 열개 가운데 아홉 개를 과녘의 정중앙에 명중시켰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해 마지않는다. 유독 기름장수 노인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었다.


남다른 노인의 미소를 본 진요자는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노인장, 제 활쏘기의 비결이 궁금하신가 보군요?" 그러자,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활이 당신 손에 아주 익숙해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라오." 노인의 말에 진요자는 기분이 상했다. "노인장, 이건 하루 이틀에 습득할 수 있는 기예가 아닙니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기름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내 경험에 비추어 그런 것뿐이라오." 


그러면서 노인은 호리박처럼 생긴 기름병을 꺼내 땅 위에 놓았다. 네모난 구멍이 뚫린 작은 엽전을 병 주둥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름통에서 기름을 국자로 떠서 서있는 자세 그대로, 병 속으로 흘려 넣었다. 병은 기름으로 고스란히 채워졌다. 노인의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진요자가 엽전을 살펴보니, 엽전에는 기름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진요자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진요자의 활 솜씨에 감탄한 것처럼, 노인의 솜씨에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게 오래도록 같은 일만 하다 보니, 그저 내 손에 익었을 뿐이라오. 기름 따르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오." .진요자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노인을 향하여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송대의 증민행(曾敏行,1118~1175)이 엮은 중국의 고사집 「독성잡지」(獨醒雜志,1186년)에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숭(戴嵩 또는 대주)은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다. 소를 잘 그렸다. 대숭은 말그림으로 유명한 한간(韓幹)과 함께 ‘한마대우(韓馬戴牛)’라고 칭송 받았다. 그들이 남긴 작품은, 그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대숭이 남긴 ‘투우도(鬪牛圖) ’ 한 폭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송대의 관료인 마지절(馬知節)이 소장하게 되었다.  마지절은 명인의 그림을 극진히 아꼈다. 비단으로 덮개를 만들고, 옥석으로 족자 봉을 만들었다. 좀이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빛과 바람이 좋은 날을 택해 자주 밖에 내다 말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농부가 소작료를 바치러 그 집에 왔다가 먼발치에서 그 그림을 봤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이 모습을, 그림을 말리고 있던 마지절이 봤다. 글을 모르는 무식하고 천한 농부다. 감히 명인이 그린 작품을 보고 비웃다니, 마지절은 화가 났다. 그를 엄하게 불러 세웠다.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웃느냐?”
농부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 그림을 보고 웃었습니다.”

 “이놈아, 이 그림은 당나라 때의 대가인 대주의 그림이다. 네까짓 게 감히, 그림에 대해서 무얼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이 말에 마지절이 화가 난 것을 낌새 챈, 농부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같이 미천하고 무식한 농부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저는 소를 많이 키워본 터라, 약간 이상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소들은 싸울 때 뿔로 상대편을 받으며 공격합니다. 그때 꼬리는 바싹 당겨 뒷 사타구니 사이에 끼워놓습니다. 힘센 청년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꼬리를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소들은 싸우면서도 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지절은 얼굴을 붉어졌다.  갑자기 그림을 찢어 버리며 이렇게 탄식했다.

“대주는 이름난 화가다. 하지만 소에 대해서는 너보다도 더 무식했구나. 이런 엉터리 그림을 애지중지했던 내가 부끄럽다.”

 

현장 심리치료사들이 수치심에 대해 쓴 책, 「부끄러움이 말해 주는 것들」(패트리샤 S. 포터-에프론 &로널드 T. 포터-에프론, 김성준 옮김, 팬덤북스, 2016)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겸손의 원칙은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거나 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가끔 스스로 자신이 가소로운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물질적이거나 외적으로 대단한 어떤 것에 내 비록, 때론 기가 죽고, 때론 부러움을 가질지 언정, 그것 때문에 내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고 부끄럽다고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내가 가진 지식과 인식의 한계 그리고 그것들이 이끄는 편견과 허술함을 알게 될 때 그렇다. 사람들을 통해서, 혹은 책들을 통해서, 혹은 글들을 통해서 그런 순간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특히 고전을 읽으면, 어김없이 절로 옷깃을 여미는 때가 많다. 옛 현인들은 일상의 소소한 것에서도 자기 성찰과 반성의 기회로 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움은 멀리있지 않다. 드러난 내 부끄러움을 털어내고, 겸손해야 할 이유를 이들에게서 찾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병에 가득 찬 물은 저어도 소리가 안 난다." 우리 네 옛 속담이다.  (201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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