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는 유익한 벗이 세 가지 있는데, 이를 '삼익우'(三益友)라 한다. 구체적으로, '정직한 벗', '변함없이 신실한 벗', '식견이 많은 벗'을 말한다. 이를 '삼익지우'(三益之友)라고도 부른다. 논어(論語) 계씨 편(季氏篇)이 그 출전이다. 옛 선조들의 한시에서도 삼익우(三益友)가 담긴 싯귀절이 가끔 찾아진다. 이는 시의 내용에 따라 논어의 삼익우(三益友)와는 약간 차이를 보인다. 주로 소동파(蘇東坡)의 시어를 차용하여 사용된다. 이를테면, 소동파는 문동(文同)의 그림 '매죽석(梅竹石)'에 이런 시를 남겼다.
"매화는 차갑지만 빼어나고, 대나무는 여위었지만 오래 견딘다.
바위는 못생겼지만, 조화를 이루는 풍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을 일러 '세 가지 이로운 벗(三益之友)'이라 한다.
꾸밈없이 소박하고 선명하니 가까이할 수 있고,
세속에는 아득히 먼 듯하니 얽매임이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그립구나
아, 이런 사람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동파, '題畵詩')
문동(文同)은 북송의 저명한 화가다. 소동파의 사촌 형이면서 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다. 문동은,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는 없었지만, 오직 동파만은 나를 한 번에 보고 알아주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소동파의 지기였다고 한다.
소동파의 '삼익우'(三益友)는 위의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매화(梅), 대나무(竹), 바위(石)이다. 다른 시에서는 소나무(松), 대나무(竹), 매화(梅)를 가리키기도 한다. 특히 후자를 가리켜,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부르기도 한다. 그 공통점은 엄동설한과 온갖 풍상 그리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 본래의 색을 변치 않는 데에 있다. 이는 가을에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잎이 시들고 떨어지는 뭇 초목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비로소 그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벗으로 번역되는 한자 '友'(벗 우)의 사전적 뜻은 무려 아홉 가지나 나온다. 1. 벗(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2.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3. 뜻을 같이 하는 사람, 4. 벗하다, 사귀다, 5. 우애가 있다, 사랑하다, 6. 가까이하다, 7. 돕다, 8. 순종하다(順從--), 따르다 9. 짝짓다.
어원적으로 한자 '友'(벗 우)에 해당하는 갑골문자는 오른손 두 개가 맞잡은 형상이다. 이는 각기 다른 두 사람의 손 두 개를 나란히 함으로써 두 사람이 서로 '돕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 비슷한 의미의 한자는 '佑'(도울 우)가 있다. 오른 손(右) 옆에 사람(亻)을 세워둠으로써 두 사람이 서로 '돕다'(佑)라는 의미를 가진다. 정리하면, 벗은 '서로 돕다'의 의미가 그 바탕에 깔려 있고, 비슷한 또래의 친하게 사귀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깝다는 점에서 친구, 동료, 연인, 부모 자녀 형제를 포함하는 가족, 부부, 구성원, 이웃, 사물 등등으로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이로써 벗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포함되는 개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
심리상담의 현장에서 접하는 주요내용은 주로 인간관계에서 파생한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인간관계가 인간의 행복, 불행과 같은 정서적 감정을 포함하여 심리적 갈등과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공감력의 결여나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는 갈등과 마음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개입된다. 특히 사람을 상품가치 혹은 도구나 수단가치로 인식하는 요즘 세태에서 온전한 인간관계는 더욱 힘들고 어렵다. 이런 점에서 논어와 소동파가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삼익우, 즉 유익한 세 종류의 벗은 인간관계의 제반 상황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좋은 인간관계를 가능케 하는 벗의 기준을 제시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벗을 어떻게 사귈 것인가라는 방법론은 논어에서 찾아진다. 논어, 안연 제24장에 증자(曾子)의 말에 요점이 있다. 즉,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이 그것이다. 풀이하면,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서 서로의 인덕을 돕고 더한다"가 되겠다. 논어주소에 풀이하기를, "군자는 문(文)과 덕행(德行)으로써 붕우(朋友)를 모으고, 붕우(朋友)가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道)가 있는 것은, '서로 도와서' '각자의 인덕(仁德)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말이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붕(朋, 벗 붕)은, 특별히 '생각과 뜻을 같이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갑골문자에서 붕은 새 두 마리가 나란히 하는 형상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 붕우는 생각과 뜻을 함께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가깝고 친밀하며 기꺼이 서로를 돕는 벗'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도 비슷한 경구가 찾아진다. 고려말의 비구승 야운(野雲)은 자경문(自警文)에서 ‘새가 장차 쉬려 함에는 반드시 그 숲을 가리고 사람이 배움을 구함에는 스승과 벗을 가리나니, 숲과 나무를 가리면 그 머묾이 편안하고 스승과 벗을 가리면 그 배움이 높아지느니라' 하였다. 이는 논어의 가르침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좋은 벗의 특징이 그늘이 좋고 안전한 숲과 나무처럼 '그 머묾이 한결같이 편안하고 더불어 배움이 높아진다'라고 가르쳐 준다.
또 벗의 개념을 사랑 혹은 연인 간의 사귐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스캇펙은 진정한 사랑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논어의 '이우보인'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즉,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 준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또는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 주려 애쓰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만족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안다.
요약하면 벗과의 사귐에 있어서 바람직한 기준은, 첫째, 글과 학문을 통하여 정직하고 성실하며 마음이 한결같은 유익한 벗을 가려 사귀어야 하고, 둘째, 지식과 견문을 교류하고 나누며 서로의 인격과 덕이 올바르게 성장하는데에 있으며, 셋째, 궁극적으로 인(仁)의 행함(덕행의 실천)을 서로 보완해주고 도와주는 데에 있다'라고 하겠다. 진정한 사귐의 관계는 서로 간섭하고 강요하거나 구속하는 관계가 아니다. 각자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서, 서로를 지지하고 돕는 관계다.
그렇다면, 사귐의 주체로서 유익한 벗을 원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실천적 태도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맹자가 제시한다.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부귀를 내세우지 않고, 형제 가문을 내세우지 않고 벗해야 한다. 벗한다는 것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니, 내세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맹자, 만장 하). 말하자면, 자신이든 상대든 간에 외적 조건을 내세우거나 전제로 삼지말라는 말이다. 외적 조건이 사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다. 믿음의 결여는 곧 바른 것을 분별하는 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성의 결여는 낮은 자존감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믿음과 배려는 인격이라는 덕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
자신의 인격수양이 덜되어 있으면 필히 세 종류의 해로운 벗에 가까워진다. 이를 손자삼우 (損者三友)라 한다. '외형만 그럴듯하고 실제로는 한쪽으로 치우쳐 편벽이 심한 자', '부드러운 말로 비위를 잘 맞추며 칭찬하며 아첨하는 자', '그럴싸한 말로 둘러대며 변명을 잘하는 자'가 이에 해당된다.
존재 위백규 선생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해로운 벗에 대해서 설명한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자,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헐뜯는 자, 남의 잘못을 엿보며 관찰하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이요 정의라고 생각하는 자, 밖으로 선(善)을 내세우고 안으로는 남을 해치는 독소를 퍼뜨리는 자, 벗에 대해 믿음이 없는 자,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해서 받들어 주기를 좋아하는 자, 친구에게 부러운 점이 있어서 아첨하고 빌붙는 자, 잘못을 일러 주면 버럭 화내고 노여워하는 자, 선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샘내는 자,... 재화를 욕심내는 자, 부귀를 부러워하는 자, 권세에 빌붙는 자,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자, 자신이 잘하는 것을 뽐내는 자, 시대의 풍조를 애써 좇는 자, 잡스러운 사람들과 교유를 맺는 자, 관청에 소송을 즐기는 자,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 꾸미는 자, 관장(官長)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언어가 들뜨고 허황된 자, 남에게 아첨하며 기분 좋게 하는 자 등은 모두 벗으로 삼아서는 안 되니, 재앙이 반드시 내 몸에 미친다."(위백규, '붕우', 존재집)
현실을 가만히 살펴보면, 겉만 보고 좋은 벗을 가려서 사귀기란 정말 어렵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고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렵지 않게 유익한 벗과 해로운 벗의 실상이 드러난다. 자신이 유익한 벗인지, 해로운 벗인지를 따져보는 자기 성찰의 기회가 거기에 개입할 자리는 없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과 갈등의 원인은, 언제나 내가 아닌 너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애당초 시작하지 않았으면 하는 후회막급한 사귐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필연이라는 확신으로 시작한 사귐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픈 기억은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에 깊이 그어진 정신적 상처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어린 시절에 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평생 따라다니며 개인의 삶을 간섭한다. 정신적 충격이 크면 클수록, 그 영향력은 커진다. 비슷한 상황과 조건이 형성되면, 마치 자동제어장치처럼 그것을 감지하여 반응하고 자동으로 작동한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째튼 유익한 벗을 가려서 사귐은 인간관계의 성공과 정신적 행불행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 맹자의 가르침과 존재 위백규 선생의 가르침은 벗의 사귐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결국, 좋은 벗, 유익한 벗을 사귀려면 먼저 자신이 유익한 벗의 기준에 적합하도록 애쓰고 노력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스스로가 해로운 벗이 되지 않기를 경계하고 노력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이는, 곧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마라, '라는 동서양 공통인 황금률의 핵심이기도 하다.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과 그 생각을 실천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차원이다. 흔히 생각과 실천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실행으로 이행되지 못한 생각은 단지 상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상상은 언제나 아름답고, 현실은 냉혹하다.
진실되고 한결같은 유익한 벗이 그립다. 가슴 따뜻한 사람의 냄새가 여전히 그립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립다'하는 실제 의미는, '스스로 그렇지 못하다'는 다른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시 유익한 벗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세 가지의 유익한 벗'(益者三友), 매죽석(梅, 竹, 石) 혹은 송죽매(松, 竹, 梅)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오해든 착각이든 허망한 기대든 허황된 환상이든, 실망하고 실망시키는 것은 오직 사람밖에 없다. 다만 비록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내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타인이든 자신이든 어떠한 관계에서도, 진심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애써 작은 위안을 가지려 한다. 옛 현인들이 사람 대신에 사물과 벗하는 그 심정을 헤아려 본다. 나는 때때로 그늘이 풍성한 나무를 꿈꾼다. (2018.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