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위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로칼랭 Jul 23. 2021

타인의 친절이 나를 살릴 때

# 게릴라 같은 친절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다면,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모든 일에서 멈춰 선 적이 있다면,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을 강타하는 좌절이라는 건 단 한번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팠던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에게 배신당한 대학교 때도, 그리고 첫사랑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던 날에도 나는 이것이 벼랑 끝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삶은 나를 끝까지 몰고 가서 상상도 못 했던 벼랑 끝에 나를 세우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침대에 누웠다.






친한 동생이 전화가 왔다.


"언니 어떻게 지내?"


이 질문에 나는 '나 괜찮아. 잘 지내'라고 대답했지만, 머릿속은 삶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이 됐다.


"넌 어떤데?"


내가 다시 물었을 때 동생은 무료한 점심식사를 막 끝낸 사람처럼, 하품을 하듯 대답했다.


"안 좋아. 힘들어."

"왜?"

"그냥... 뭘 위해 살아야 하는 건 지 모르겠어."


동생의 이런 푸념은 처음 있던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10년 전쯤 KBS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터키에 지진이 발생한 어느 날, 급하게 취재를 떠나게 된 한 PD에게 국장은 나를 붙였다. 우리는 그렇게, 먼 나라에 찾아온 끔찍한 슬픔을 취재하기 위해 늦은 밤에 만났다. 섭외가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현지 교회 한인 목사님께 동행을 부탁했고 동생은 바로 카메라를 들고 터키로 떠났다.


 그렇게 지진이 채 끝나지 않은 터키의 어느 무너진 건물 속에서 힘든 취재를 하고 돌아온 동생 PD는 밤새 함께 편집해주던 나와 '동료'가 됐고, 서로의 삶을 나누게 됐다. 죽음의 공포, 자연 재난이 준 좌절 같은 것이 그녀를 서정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리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나를 인생의 슬픔을 나누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녀가 깊은 통증을 경험하는 것을 바라봤다.  일에 대한 회의, 능력이라는 것의 한계치를 마주하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내 앞에서 술 취해 울고, 등 돌려 토사물을 감출 때에도 나는 특별한 위로를 전해주지 못했다. 그냥 함께 해주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잠적하듯 사라졌다. 나 역시 그렇게 사라진 적이 있었기에, 나는 그녀를 서둘러 찾지 않았다.


 1년 정도 시간이 지난 어느 늦은 밤, 동생이 나를 찾아 내 집 앞까지 왔다. 웃으며 인사했다. '언니. 안녕?'이라고. 아이처럼 쑥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웃었다.


 그날 밤, 서로의 인생이 어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는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웃으며 헤어졌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라면 엔딩 컷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 인생이 어찌 그럴까.  이제 파트 1이 끝났을 뿐. 인생의 고통은 다시 2막을 열였다.  


 힘들게 다시 방송을 시작하고 바쁘게 살면서도 동생은 아직도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해야 하지?'라는 질문은 답을 알 수 없는 킬러 문제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나에게도 묻는다. '언니, 나는 누구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지?'라고.


 이럴 때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너. 너한테 가치 있는 사람이지. 그리도 나에게도. 너희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너무 많아.'

  

 그녀가 그저 결혼하지 않아서라거나, 남자 친구가 없어서라고 말할 수 없다. 인생이 주는 고독함이라는 건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멍에로 우리를 평생 괴롭히기 때문이다.

 

 




 외로운 밤 - 함께 산책 나갈 사람이 있을 때도 있지만 - 바쁜 가족들이 같이 걸어주지 못할 때, 나는 이제 일곱 살이 된 '하니'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데리고 무작정 거리를 걷는다.


 상쾌한 공기, 분주한 자동차, 땀 흘리며 뛰는 사람들과 여정 없는 길을 가는 자전거 사이에서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보>를 떠올린다.



[산보]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양복점에도 들어가 보고 영화관에도 들어가 본다.

펠트로 만든 백조처럼 시들고, 뚫고 들어갈 수 없이 되어,

근원의 물과 재 속으로 나아간다.


이발관 냄새는 나로 하여금 문득 쉰 소리로 흐느껴 울게 한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돌이나 양모처럼 가만히 놓여있는 것.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더 이상 상점들을 보지 않고, 정원들, 상품, 안경들, 엘리베이터들을 보지 않는 것.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을 때가 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을 때가 있다.


    (중략)


그리고 그건 나를 어떤 구석으로 몰아넣고, 어떤 축축한 집으로,

뼈들이 창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병원들로,

식초 냄새나는 구둣방으로 몰아넣고,

균열처럼 무서운 어떤 거릴 몰아넣는다.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보> 중에서





영화 <타인의 친절/The Kindness of Strangers>, 2021년 '론 쉐르픽' 감독



 클라라는 경찰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늦은 밤 아이들과 도망친다.  도망치던 날, 엄마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아이들에게 '서프라이즈 뉴욕 맨해튼 여행'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폭력 아버지를 피해, 엄마와 도망치는 중이라는 것을.


 돈 없고, 차도 없다는 것은 곧 '잠들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가난과 고통의 방랑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되돌아갈 수 없었다. 클라라는 음식을 훔쳐 아이들을 먹이고, 동냥해 아이들을 씻기고, 또 누군가를 속이면서 잠자리를 찾는다.


 추운 겨울, '맨해튼'이라는 차가운 도시에서 클라라가 완전한 절망에 빠졌을 무렵, 영화는 클라라처럼 상처 입은 다른 사람들을 그녀의 주변으로 모은다.

  마약 중독자로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사는 남자 '마크'와 변호사로 일하지만 인생의 무기력함에 빠진 '존 피터'. 러시아 사람도 아니면서 러시아인처럼 속이고 식당을 하고 있던 '티모피', 잘하는 것이 없어 매번 직장에서 쫓겨나는 청년 '제프'. 그리고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응급실 간호사 '앨리스'까지. 낯선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녀와 마주한다.

 마치'루처'처럼 인생의 패배자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조금씩 클라라의 삶에 관여하게 되고, 도움을 준다.


  누군가는 돕고, 또 누군가는 도움받는 법을 배우면서 - 만남은 뜻밖의 상황들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간다.  


 영화 <타인의 친절/The Kindness of Strangers> 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뉴욕의 '어떤 이'들이 정말 낯선 '어떤 이'를 만나면서 서로를 발견하는, 또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키는 영화다.


 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부감 없이 보게 된 이 영화에서 웃음을 잃어버리고 생존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웃음울 주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저기가 맨해튼이야."

  "학교는요?"

  "뉴욕이 학교가 되어줄 거야"


  관객이 엄마의 바람대로 '거리가 아이들의 학교'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쯤, 낯선 타인은 찾아와 묻는다.


  "우리 집에 있을래요?"

  

 이 한 마디는, 클라라와 아이들에겐 사람이 소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방황은, 10대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들고 늙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방황한다.

 다행인 것은 그런 방황 속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뜬금없이 찾아온 타인에게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거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어떤 분들은 의지할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타인은 있잖아요."

                

   - 영화 <타인의 친절> 속 '엘리스'의 대사 중에서






무덤처럼 균열된, 균열처럼 무서운, 무섭지만 도망칠 수 없는 어떤 거리에 서 있다고 느낄 때.

나와 같은 고통을 알고 있는 누군가라면. 그가 타인이어도 함께할 수 있다.


위로라는 건 그런 것이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해의 눈빛.

'너가 괜찮아질 때까지 같이 있어줄게.' 같은 잔잔한 미소.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친절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다면.

그 사람이 오늘의 나일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무엇을 위해 웃고 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