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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핼리 Halley Jul 05. 2022

흔한 스물일곱살 남자의
미용실 정착기

'안정감 60%, 새로움 40%'의 황금 밸런스를 쫓으며

위인의 아이콘 '헬렌 켈러'는 말씀하셨다.


눈앞에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게 되지.
우리는 때때로 '닫힌 문'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어,
'새로 열린 문'을 발견하지 못하곤 해.




남자들이 다니던 미용실을 옮기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경우다.

(1) 내가 이사를 갔거나, (2) 디자이너 선생님이 없어졌을 때.


미용실을 옮기는 일은 나 같은 P사람에게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내가 기존에 다니던 미용실에서 요구하던 서비스는 많지 않았다. 지저분 해진 머리를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준수한 커트 실력에 한 달에 한 번 샴푸를 받으며 시원한 머리 마사지를 받는 것.

그리고 매달 다른 디자이너를 찾아야 하는 품을 덜어주는 간단한 예약시스템.





네이버 예약이 없던 시절에는 커트를 그저 에 맡기곤 했다.


전화로 예약을 걸어 특정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맡기기보다는 그냥 근처 깔끔해 보이는 미용실에 들어가, 시간 비는 선생님에게 커트를 받곤 했다.


감각적인 부분이 필요한 직업이다 보니 가끔 팔 하나를 타투로 채운다던가 담배 냄새가 풀풀 풍기며 사내 포스를 보이시는 디자이너분들이 있는데,


나는 타투도 별로 안 좋아하고 담배도 안 피우다 보니 어쩌다 이런 분들에게 걸렸을 땐 재방문을 고사하고 또다시 새로운 미용실을 찾아 떠났다.



미용실 노마드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2년간은 한 곳에 정착해 매달 방문했다. 디자이너 선생님은 나보다 나이가 살짝 더 많은 남자였다. 같은 남자로서 머리에 대한 고민을 잘 이해해 주셨고 일정한 퍼포먼스를 발휘하셨다. 물론 팔 가득 타투도 없고,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남자 둘이서 뭐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날씨 얘기와 형식적인 안부만 묻는 사이였지만, 나의 침묵과 매달 이뤄지는 재방문은 디자이너 선생님에 대한 믿음을 표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세 달 전, 3년 만에 풀린 벚꽃놀이에 세상에 모처럼 활기가 돌던 나날이 이어졌다.
당시 나는 막 학기를 남겨두고 대면 학기를 통보받았다.
2년 간 비대면 수업에 익숙해지며 편안함만을 추구하던 때에 대면 학기 소식은 썩 달갑지 만은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고 그래도 몇 년 만에 주기적으로 가게 된 캠퍼스에
고학번 티 내면서 꾀죄죄한 꼴로 다니진 말아야겠다 싶어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네이버 예약을 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간단한 인사만 하고 꼿꼿이 앉은 채 딴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평소 말을 잘 안 걸던 디자이너 선생님이 얘기를 꺼내셨다.


"이번에 미용실을 옮기게 됐어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동탄이요. 근처로 가면 따로 연락드릴 텐데, 너무 멀어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아, 더 좋은 조건으로 가시는 거죠?"

"네, 좋은 기회가 생겨서요."

"잘됐네요."

......


무미건조한 대화였지만, 축하의 말은 진심이었다.
도전을 이어나가는 삶은 내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갑자기 교수님이 예정에 없던 과제를 내준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거 말고도 다른 삶의 과제가 많은데...


당장 다음 달부터 수많은 후기들을 찾아보고,
모발을 실험체 삼아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미용실 노마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밀린 과제를 한 동안 잊고 지내다
거울에 비친 옆머리가 덥수룩해진 것을 보며 부랴부랴 미용실을 찾아보았다.

  
네이버에 '미용실'을 검색해보니 지도에 빽빽하게 스팟이 찍혀 있었다.
어쨌든 이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소에 못해본 스타일로 바꿔보자는 심정이었다.
평소 '바버샵'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지만
얼굴이 엄청 남성적이지도 않고, 짧은 머리도 잘 안 어울린다 생각하여 쉽사리 도전하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과 '바버샵' 방문 사이에서 적절하게 타협을 본 후 후기가 괜찮은 '남성 전문 미용실'을 예약하게 됐다.



그렇게 방문한 '남성 전문 미용실'의 첫인상은 '인스타 감성 개인 카페' 같았다.
벽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놓고, 합성 우드로 마감한 전신 거울과 서랍장 그리고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의 커튼까지. 나무 도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내오면 '인스타 감성 카페', 완성이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처음 한 일은 제공된 마스크로 갈아 쓴 것이다. 전에 다니던 곳은 마스크를 따로 주진 않았던 거 같은데, 요즘은 이게 기본 서비스 중 하나인가 보다.


디자이너 선생님이 오셔서 첫 방문인 만큼 '아이스브레이킹'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나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은 듯한 남자 선생님이었다. 커트를 하면서 간접적인 호구조사가 들어왔다. 직업이 무엇인지, 집은 근처인지, 미용실은 왜 옮기게 되었는지 등등.


나는 심문을 받는 죄수처럼 의자에 묶인 채 묻는 말에 성실하게 답변을 했다. 뭐 그분도 좋아서 말을 건네는 거겠냐만은 이런 류의 대화는 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


대화란 서로 궁금한 것을 알아가는 재미인데, 초면인 남자 둘이서 과연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디자이너 선생님은 이 대화를 통해 고객 재방문이라는 기대효용이 있겠지만, 손님인 내 입장에서 이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커트가 마무리되고 머리를 감으러 갔다. 첫 방문이라 그런지, 샴푸 하는데 특히 더 신경을 쓴 게 느껴졌다. 물 온도도 적당했고 머리 마사지도 시원했다.

  
거기에 '치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짜낸 어떤 거품을 내 머리에 발랐는데 두피가 굉장히 시원했다. 헬륨인가 질소였던 거 같은데 이런 서비스는 처음이냐는 듯,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말씀해주셨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전에 다니던 곳에 비해 7천 원 더 비싼 25,000원을 결제하고 나서 카카오톡 채널 추가를 하고 나왔다. 말은 좀 많이 걸었지만 샴푸 서비스도 괜찮았고, 결과물도 썩 나쁘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을 뒤로하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서 '어땠어?'하고 물어보면, '어, 나쁘지 않네'라고 답할 수 있는 정도.


뒷 맛이 썩 개운치 않았지만, 뭐 괜찮았다. 한 달 뒤에 다시 머리를 해야 되는데 굳이 새로운 곳을 알아볼 여유가 없다면 다시 방문할 거 같았다.




그러나 그 '남성 전문 미용실'에 다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운명의 미용실을 만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학기 종강을 하고 부담감에서 해방된 채 침대에 누워 인스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피드를 내리며 시간을 때우던 중 헤어 유튜버 '금강연화'의 커트 비용을 갖고 갑론을박하는 게시물을 보았다.


아무리 유명해도 커트 한 번에 8만 원 이상을 내는 건 너무 비싸다는 반대 측과,

'금강연화'가 '화타 선생' 마냥 탈모인 사람들 커트로 되살려낸 걸 보면 8만 원은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다라는 찬성 측 의견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 의미 없는 논쟁 하고 있구나 하며 댓글을 내리던 중 '반대 측'에 속한 한 댓글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 동네에 '오로지 가위'로만 커트하시는 분이 있는데,
비달 사순을 졸업하시고 청담동에서 오랫동안 끗발 날리신 분이다.
'그 가위'를 한 번 경험하고 나선 자기는 거기밖에 안 간다는 내용이었다.


대댓글에는 '거기 대체 어디냐'는 물음표 핑이 계속 찍혔지만, 댓글 작성자는 '지금도 예약하기 빡세다. 못 알려준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댓글 작성자가 의도했든 안 했든 사람 심리를 아주 제대로 건드렸다.


감질맛 나게 하면서 정작 어딘지는 안 알려주니 사람들은 점점 더 그 미용실에 집착하게 되었다.


나도 와드 하나 꽂아놓고(간단한 댓글 하나 달아놓고) 다른 피드를 보고 있던 중 구세주 같은 알림이 울렸다. 그분께서는 일절 수식어 없이 딱 세 글자만을 남겨두고 떠나셨다. 'ㅇㅇㅇ'



알람이  사라지기  나는 네이버에 'ㅇㅇㅇ'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가 나오자 나는 속으로 '유레카'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내가 맨날 가는 동네잖아'


홈페이지를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원장 선생님의 이력에 '비달 사순'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진 '비달 사순'이 뭔지도 몰랐다.

런던에 위치한 알아주는 미용 아카데미란다.
그 밑에는 '청담동'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력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평소에 '청담동' 미용실에 심리적 벽이 있었다. 그곳은 연예인 혹은 인플루언서나 되면 방문하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다. 언젠가 돈 좀 벌면 가보려나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내가 자주 가는 동네에서 그 '청담동 맛'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예고편을 본 기분이었다.
'뭔가 달라 보여. 비달사순이 뭔진 잘 몰라도 여긴 꼭 가봐야 돼..!'




며칠 째 비가 그치질 않던 6월의 마지막 날,
통통배 같이 생긴 검은색 뉴발란스 쪼리를 신고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지하철에 올랐다.

  
평소에 자주 가던 동네를 한 번 더 가는 건데 오늘은 왠지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미용실 가는데 설레 보긴 또 처음이네.

그곳에 처음 발을 들이고 받은 느낌은 생각보다 친숙했다.
커트 비용에 비례해 좀 더 정숙한 분위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들어가자마자 보조 선생님께 샴푸를 받은 후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잠시 후 드디어 원장 선생님께서 내 거울 시야에 비쳤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가죽 부츠에서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나의 요구사항을 간단히 접수하신 뒤
전문가적 견해를 섞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시고, 곧바로 '가위'를 꺼내드셨다.


나는 살짝 긴장되었다.
말로만 듣던 '그 가위'다.
십수 년을 업계 최전선에서 갈고닦아 온 가위 실력을 드디어 경험해보겠구나..!


평소에는 커트를 받으면서 주로 딴생각을 하는데, 이 날만큼은 선생님의 가위질에 집중했다.

역시 소문대로 95 대 5의 비율로, 바리깡의 개입은 최소화하며 가위로만 다듬어 주셨다.

 

뒤통수에서도 원장 선생님께서 집중하신 게 느껴졌다.
평일 1시 예약이라 그랬을까,

원장 선생님은 말 한마디 없이

유려한 가위질을 선보이셨다.

나도 덩달아 집중하여 커트를 받던 도중,

갑자기 '쨍그랑' 울리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옆에 보조 선생님이 자리를 정리하다 무엇인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원장님께서도 놀라시며
"지금 집중하느라 예민한데 그거 때문에 집중이 깨지잖아" 말씀하셨다.
짜증이 섞였다기보다는 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진심으로 놀라셔서 하신 말씀 같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상한 포인트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지금 원장 선생님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나'잖아?
가위 장인의 집중을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큰 영광으로 다가왔다.

원장 선생님의 유려한 가위질을 받으면서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프로정신 갖고 전문가로 일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결과물은 대만족이었다.
원장 선생님의 후광효과에 가려 객관적인 판단력이 흐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만족도였다.

  
전에 다니던 미용실 커트 가격 두배에 가까운

30,000원을 결제하면서도
'돈은 이렇게 써야 되는구나'하며 기분 좋게 카드를 내밀었다.

  
원장 선생님의 수년간 축적된 노하우와 40분간 집중력을 할애한 노력에 비해 30,000원이란 값이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어쩌면 다음번에 방문한 날이 하필 원장님 컨디션이 나쁜 날이거나 체력적으로 부치는 시간대에 방문해 이번만큼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분간은 계속 이곳을 찾게 될 거 같다.


내가 원래 '열정' 있는 사람에게 약하다.
원장 선생님의 가위질에서 얼마간 까먹고 있던 자부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 이랬던가.
헬렌 켈러 선생님의 말씀처럼
닫힌 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이 열린 문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펼쳐졌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고는 하는데,
가끔은 익숙함을 잃는 일도 필요한 거 같다.

조승연 작가님은 '60%의 안정감과, 40%의 새로운 경험'이 가장 최적의 행복 밸런스라고 말씀하셨다.


안정감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목표이지만,
이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만으로도 행복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에 하나씩.

다시 미용실에 정착하여
다른 분야에서 도전을 시도할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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