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분의 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창선 Mar 11. 2020

브랜드 디자인 한다니까 친척어르신이 말하시길...

그 분이 말한 한마디는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난 순식간에.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의 직업군은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넌 요즘 뭐하니? 라고 부모님이 물어보면 사실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긴 하는데 잘 전달이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설명이 되던가요? 특히 여러분이 스타트업에라도 다니고 있다면 <'작은 회사' 에 다니며 근근히 먹고사는 우리 새끼> 정도로 인식하실 지도 모릅니다. 시리즈C를 받고 유니콘을 향해 달려도 '작은 회사' 다니는 짠한 내 새끼...


하물며...회사도 안다니고 혼자 사업하는 저야 오죽하겠습니까. 부모님 머릿속에 제 직업은 


"혼자 그냥 뭐 이것저것 하며 사는"


정도로 정의내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이것저것 보여드리고 "이렇게 산다 저렇게 산다... 나 굶고 살지 않는다... 아니 제발 좀... 빚 안졌다고..." 끊임없이 말한 덕에 그래도 이름은 모르지만 대강 어떤 종류의 것을 하고 사는 지 정도는 알고 계시죠. 



여러분도 모를까봐서 간단히 설명하면 저는 '애프터모멘트' 라는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초기브랜드 구축에 필요한 3가지를 만들어요. 회사소개서를 주축으로 한 브랜드가이드와, 슬로건이나 매거진 같은 텍스트콘텐츠 그리고 영업메뉴얼 기획을 하고 있죠. 1인 기업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종종 팀을 꾸려 함께 프로젝트 하기도 한답니다. 또는 클라이언트 회사의 TF팀을 꾸려서 내부에서 직접 플젝을 진행하기도 하죠. 



이 정도면 여러분은 이해되시나요? 사실 한 회사에 뼈묻고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던 시기에 비하면 뭔가 굉장히 파격적이긴 하죠. 부모님 입장에선 회사에 있을라면 있고, 사업이면 사업이지 뭘 들락날락 그러는가 싶기도 할거고...혼자서 뭘 한다는 건 지 선뜻 이해가 안가긴 할 거에요. 


놀랍게도 어르신들 뿐 아니라, 친구들도 물어보더라구요.


'창선인 머더고 사냐?' 

'몰라, 이것저것 하던데?' 


아니 대체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도 아직도!!!! ....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동생 결혼식 때 터졌어요. 동생 결혼식이니까 친척들이 오만육만 모였을 거 아니겠어요? 동생이 개혼인지라 친척 어셈블이었거든요. 진짜 어디서 포털열리면서 니범베!! 니범베!! 소리 들리는 듯.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당숙어르신, 이숙할아버지...뭐 제일 큰 아버지...큰 어머니 등등... 사실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척어르신들이 몰려들었어요. 저는 축의금 받는 역할이었으니 데스크에 있었지만 종종 아버지께 소환되어 악수와 '어이고 창선이 잘사냐. 많이 컸네' 라는 소리를 육백만번 정도 들어야 했죠. 친척 안보고 산 지 너무 오래되서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삶이 다 그렇잖아요. 내 코가 석잔데 누굴 챙기고 살겠어요.


그러던 도중 큰 아버지가 오셨어요. 보통 큰아버지는 악수를 굉장히 꽉 하세요. 


큰 : "어어어..창서니. 그래. 요즘 뭐하고 지낸다고??"

나 : "아 예, 그 디자인 하고 있습니다."

큰 : "어어..디자인? 뭐 패션 하는거여?"

나 : "아 그것은 아니고..그 회사들의...."

아버지 : (인터셉터하더니) "아 그 있잖소 형님, 회사 로고랑 브로셔 만들고 이런거."


의외로 잘 설명해서 깜짝놀랐어요. 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지.


큰 : "(잠시 곱씹) 아...그럼 그 간판때기같은거 만드는 거여?"

아버지 : "(귀찮았는지) 어어 맞어요 그거. 그냥 그런거 해."

나 : "(개당황) 아..아니 간판은 아니고 그..."

큰 : "창선이 간판집 한댜."

큰어머니 : "아 간판한다고??..어쩌다 간판일을 하게 되써야?"

나 : "간판이라기 보단 그 회사의 로고나 브랜드만드는(아차싶) 아니 브랜드..가 뭐냐면.."

큰어머니 : "(작은어머니에게) 창서니 간판집 사장 되브써."

작은어머니 : "뭐라고? 간판한다고? 그거시 예전에나 돈이되쩨 지금 그런거 해서 어쨔."

큰어머니 : "애가 똘똘항께 잘 알아서 하거쩨."

큰아버지 : "거 간판도 좋지만...기술배울라면 전기나 목공 쪽도 함께 꼭 해라잉."

나 : (정신이 아득) 간판이 아니고 아버님, 회사에서 필요한 디자인들 만들고 있습니다.

큰아버지 : 아 그 길거리 간판이 아니고? 그럼 (내가 보여준 사진들을 보며) 아..........

나 : (그래!! 이제 이해하신 모양이야!!)

큰아버지 : 아....이거 그그....

나 : (좋아요 아버님 그걸 말씀해주세요!!!)

큰아버지 : 이거 그... 찌라시같은거 하는구만. 인쇄소, 그 인쇄구만 인쇄!

큰어머니 : 아 ..그 인쇄까지 하는거여? 

나 : .........


그렇게 전 간판집 사장 겸 찌라시 만드는 인쇄소도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그 쪽이 훨씬 마진은 잘 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긴 하네요. 저번에 처가 식구들 만났을 때도 제가 책썼다고 싸인해서 드리고 그랬는데 외삼촌께서 그러시더라구요.


"아..그 책쓰면..작까..그런건가보네. 작까..(얼굴 못마땅하심)..쓰읍..근디 그 작까가.."


뭐 대략 지하방에서 머리 기르고 라면만 먹으며 고통어린 미간으로 단어를 쥐어짜는 고독한 시인의 이미지 정도를 생각하셨나봐요. 거의 무슨'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스러운 정서...두 점을 치는 소리...





 그렇습니다....삶의 방식이 모래알만큼 많아진 요즘인지라 서로가 어떻게 살아가는 지 설명이 필요하기도 하고, 듣다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상대방을 통째로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삶을 책임져야 하죠. 안정적인 방식이든 불안한 방식이든 말예요. 안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회사는 큰 배고, 저같은 1인사업가는 작은 배 같아요. (나무쪼가린가...) 어차피 파도 한 번 치면 와르르 무너질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존재들이죠. 사실 큰 배를 뒤집을 파도가 와도 버티는 배가 있고, 못 버티는 배가 있어요. 수십미터 짜리 파도와 홀로 맞서도 코막고 물속에서 기다리면 죽지는 않죠. 맛탱이는 가겠지만. 


이 세상에 안정이란 게 있긴 한가 싶어요. 어차피 인생 길게보면 모두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것 같고, 현타도 오고, 어느새 늘어버린 수영실력에 깜짝 놀라기도 해요. 어떤 놈은 태양빛에 날치를 구워먹는 방법도 깨닫고...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요. 


이제 그 방식은 너무도 다양해졌고 모두가 매 순간 출발선에 있기도, 결승선에 다다르기도 해요. 정해진 코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으로 지워졌어요. 정해진 화살표도 비바람에 바래졌고, 나보다 앞서 간 사람들의 메아리나 흘리고 간 물건 정도가 삶의 이정표가 되는 시대에요. 


이런 세상에서 내가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 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내 삶을 남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동의받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뭘 해먹고 살든 내가 당당하고 뿌듯하면 된 것이지. 간판집이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간판 맞기도 하죠 뭐. 남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힘들 때마다 다시 생각해보려고 해요. 어찌어찌 걸어와서 뭔가 설명하기 힘든 묘한 나만의 길을 찾아내긴 했구나. 라고. 


여러분도 설명하기 힘든 것들을 많이 만들어보세요. 대답은 '이것저것 하고있어' 정도면 충분할 거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장사 안되서 울상짓는 쇼핑몰의 공통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