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에 처음 브랜딩이란 걸 접했을 때가 기억나요. 디자이너들 모임에 가서 '창선님은 어떤 디자인 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고 조금 고민해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회사소개서를 주로 만들고 있었어요. 그 땐 플로우기획이나 텍스트까지 만들진 않았기 때문에 정말 클라이언트의 왼손오른손의 역할일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편집이요...'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다 만들고 있는 거에요. 로고도 손대고 있었고 콘텐츠도 만들고 있었고, 심지어 가끔 사진도 찍었어요. 텍스트도 엉겹결에 만질 수 밖에 없었고. 소개서란 게 그렇잖아요. 막상 만들려고 클라이언트에게 요청해보면 아무것도 없어서 어차피 직접 만들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 합니다 란 말과 함께
로고자인도 하고..편집도 가끔 하고..굿즈도 만들었던 것 같고...행사쪽도 했었어요...
라고 대답했었죠. 그러자 다른 디자이너님이 대답하셨어요
"아 브랜드디자인 쪽 하시는구나?"
그 때 처음 들었어요 브랜딩이란 거. 저는 그게 브랜딩인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똥멍청이같은 생각이었지만 그 분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았겠죠? 냉큼 강남교보로 달려가서 경제경영코너에서 브랜딩이라고 써진 책들을 우르르 읽어보았어요. 뭐 처음은 당연히 '나음보다 다름' 이런 책이었을 거고, 일본에서 넘어온 그런 경제경영서를 주로 보았더랬죠. 그리곤 좀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지기 시작합니다.
5년 전의 브랜딩
ㅋㅋㅋㅋㅋ5년 전 5년 전엔 브랜딩을 '회사에서 활용하는 모든 것들을 통일시키는 과정' 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극히 디자인적인 관점의 정의였죠. 일단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소개서 제작이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만든 소개서가 거의 브랜드가이드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부분의 클라이언트 요청은 이랬거든요.
"이번 소개서를 통해 좀 브랜딩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이라면...'그것은 말도 안됨이다.' 라고 어찌어찌 대화를 이끌어 가겠으나, 그 때는 뭐. 아무것도 모를 때니까. 그래서 저도 아...뭔가 '양식을 통일' 시키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고나 패턴 바리에이션 쳐서 이런 문서 저런 문서에 싹 적용시키는 걸 주로 했어요. 조금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문서나 제작물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달까요. 그리고 왠지 짜아아악 정리된 서류들 보면 아주 뿌듯했었죠.
4년 전의 브랜딩
사업 1년차엔 창업지원금을 받으며 살았었어요. 이게 사업자를 내고 대표직함 박힌 명함을 만들고나니 어깨뽕이 올라가더라구요. 대표놀이도 했고, 직원들과 마찰도 있었고, 자만심과 거짓부렁만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죠. 어디가서 인터뷰하고 강의하고 이런거 짱좋아하는 관종놈이었습니다.
1년 지나고 지원금 딱 끊기자 지옥이 시작됐어요. 내 인생 이제서야 필 줄 알았는데 팀원들은 떠나갔고, 클라이언트는 더 이상 오지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모은 돈도 없었고...결국 지원금으로 어찌어찌 마련한 맥북을 팔아 월세를 내면서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 땐 심적으로 매우 삐뚤어져 있었어요. 1년 동안 난 뭐하고 살았나...무슨 환상에 빠져서 이런 전두엽없는 짓을 하고 다녔을까 싶었죠. 그래서 자기혐오같은 게 생긴거에요. 정확히는 '돈이 안벌리는 것들을 무용지물!!' 이란 결론이었죠. 브랜딩은 돈이 안벌리는 곁다리처럼 여겨졌어요.. 그냥 대표의 자기만족 내지는 있어보이려고 치장하는 거품이라고 말예요..
브랜딩 꺼져
그 때부터 멋진단어, 현학적인 단어, 소비자 어쩌고, 이론, 망할놈의 사이먼시넥의 Why동그라미 등을 극혐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나 제대로 벌 것이지, 구색갖추는 것에만 신경쓴다고 생각했거든요.
3년 전의 브랜딩
이 무렵엔 돈도 없었고 우울증도 심했고...그래서 하루종일 일년내내 일만했던 시기였어요.
기업행사를 만드는 대행사에서 일하면서 많은 경험들을 했었어요. 깜냥에 안맞는 큰 기업의 행사들을 혼자 쳐내고, 기업에 전달할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이 때 처음으로 컨셉을 도출하고 정리하는 프로세스를 익혔어요. 그리고 그걸로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거나 PT를 하기도 했죠.
그 때 생각한 브랜딩은 "기업과 소비자를 잇는 시스템" 이었어요.
가성비높은 마케팅을 할 수 있는, 또는 소비자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를 구축하는 것. 이런 식으로요. 그도 그럴 것이 대행사입장에선 성과를 내거나, 행사 만족도를 내야 하고, 매출로 이어져야 하니까... 유독 트렌드나 채널, 고객경험 그런 걸 많이 생각할 수 밖에 없었죠.
이 땐 내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를 '어찌어찌 잘하면' 소비자들의 무의식에 심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인셉션마냥 소비자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팽이를 돌릴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죠. (응 그런거 없구요.)
소비자 내꺼 2년 전의 브랜딩
3년차부터는 컴퓨터를 싸들고 클라이언트 사무실에 들어가 일하는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막 3개월~6개월까지 거의 인턴처럼 함께 살았답니다. 브런치도 요맘때 터졌었죠. 이 때 부딪힌 문제점은 '실무자들의 불만' 이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익혔던 건 오로지 대표 입장에서의 브랜딩이었던 거죠. 실제로 그걸 수행하는 실무자들의 불만은 전혀 방향성이나 미션등과 거리가 먼 것들이었어요.
대표적으론 일이 너무 많다는 거고, 왜하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있었고. 쓰레기는 누가 버리냐, 이건 디자이너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의 직무불만도 있었고...
2년 전... 이 때 브런치 터짐 아주 난감했죠. 같이 회의하고 뭔갈 정리해야 하는데... 다들 입도 뻥긋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함께 쓰레기통을 비우고 커피를 타고 운전하고 까대기를 하기 시작한 거에요. 실무자들과 함께 일을 해야하니...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했던거죠. 의료기기 영업도 도와주고, 음쓰봉도 버리고, 창고정리도 열심히 했답니다.
물론 호구플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그 괴리감 있잖아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대표와 실무자의 온도차, 시각차... 업무에 녹아들지 못하는 브랜딩의 한계....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깝깝시러움.. 이런 것들이 새로운 고민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작은 부분들에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이 때 생각했던 브랜딩은 "디테일" 이었어요. 하던 일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 제품이면 제품, 서비스면 서비스... 결국 상품의 퀄리티를 높이고 이를 통해 매출을 만드는 게 브랜딩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죠. 정확히는 '하던 일부터 제대로 하자'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자꾸 일만들어서 실무자 괴롭히지 말자.ㅠㅠ 라는 의미도 있었겠죠?
디테일이 없잖아!!! 와장창 1년 전의 브랜딩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구여친 현재 마눌님이 북카페를 운영하셨어요. 오프라인 공간을 운영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챙겨도 안되는 건 안되더라구요. 열심히 SNS채널도 운영하고 굿즈도 만들고, 메뉴판도 바꾸고....컨셉을 정리한다고 정리했지만 모든 직무에 하나하나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마음이란 게 계속 바뀌더라구요. 저는 작년까지만 해도 브랜딩은 '바뀌면 안되는 것' 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무거운 의미를 부여했나봐요.
그 때의 찌라살롱 그리고 브랜드컨셉을 정하는 걸 아주 복잡하고 철저한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구글닥스에만 겁나게 뭔갈 적어댔는데...정작 손님이 오시면 새까맣게 잊혀지곤 했죠. 결국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북카페는 문을 닫게 되었어요. 그 시기의 결론은 '브랜딩은 체화구나. 뭔가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다' 였어요. 컨셉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게 행동으로 구현되는 건 다르더라구요.
지금의 브랜딩
한 달 전 지금은 음..보자. '기준' 이라고 생각해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행동해야 할 지를 분명하게 잡아주는 이정표. 그리고 이것은 대표가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경험했던 히스토리안에선 철저한 탑다운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었거든요. 물론 바텀업 사례도 굿케이스가 많지만... 현실적이론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메시지를 구축하는 단계와, 실무적용단계는 나뉘어져있어요. 현장에선 거의 구분없이 흘러가지만...
메시지를 잡아요.
1. 메시지는 대표가 잡고
2. 가이드는 실무가 잡고
3. 그걸 선언/합의해요.
실무에 녹여요.
4. 실무영역 하나하나에 메시지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찾아요
5. 그리고 실천과 실험을 통해 실질적인 매출과
6. 기업성장의 발판을 만드는 것.
7. 궁극적으로 경쟁우위가 목적이 아닌, 우리만의 플레이스를 만드는 힘.
이 브랜딩이 아닐까 라고 정리가 되었어요.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실무자들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책상 앞에 써붙일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 첫번째죠.(그걸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구요.)
하지만 나도 알아. 원래 대표님은 메시지를 잘 못잡아요. 해본 적도 없고 너무 생각은 많고 내 사업체가 사랑스러워서 뭐 하나 버리기가 아깝거든요. 그래서 실무자들이 자꾸 시각화시키고 린하게 실험해보면서 이 변덕스러운 메시지를 좁히고 구체화시켜줘야 해요. 대표님은 실무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죠. 그렇게 모아진 하나의 메시지를 선언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땅땅땅. 선언은 대표님이 하는 거에요. 실무자가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생각해보니 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대표님의 생각을 정리해서 선언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과
가이드를 만드는 것
1,2번 단계의 서포트 역활이구나. 싶었어요.
이번 책을 내고 나서 이런저런 훈계를 많이 들었어요. 아직 브랜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또는 전문지식이 아닌 팁들 위주의 책이다...이건 브랜딩이 아니다 등등... 사실 어떤 측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브랜딩을 잘 몰라요. 아마 내년엔 또 바뀌겠죠. 이제 5년차이니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다만, 저와 비슷하게 가이드를 만들어야 하고 실무단계에 메시지를 녹여야 하는 실무자들에게 해드릴 얘기는 매우 많아요. 엄청 털리며 살았으니까요. 전 되게 찌질하게 브랜딩을 배워왔어요. 돈이 없어서 10만원에도 벌벌떠는 회사들과, 꿈자리가 안좋다...감이 안온다...와이프가 아니라고 하더라...등의 이유로 메시지가 뒤집히는 현장. 5명이 한꺼번에 퇴사하면서 울어버린 대표님 등을 보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됐죠.
브랜딩은 결국 기업의 생존전략 중 하나일 뿐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회사는 어느 정도 브랜딩이 되어있다는 사실이에요. 합의와 선언의 과정이 없었을 뿐.
합의와 선언의 과정이 없었을 뿐.
생각해봐요. 신입 들어와서 이상한 콘텐츠 만들면 대리님 절레절레 하시잖아요. 대리님은 우리 회사에서 써야할 말과 스타일, 양식과 문화를 알고 있어요. 브랜딩이 된 것이죠. 문제는 모든 직원들이 대리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말이 다르고, 다들 자기가 편하고 잘하는 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우리만의 규칙을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해요. 브랜드는 아무나 들어오고 아무나 일할 수 있는 곳이 되면 안되거든요.
이번 책 '어느 날 대표님이 우리도 브랜딩 좀 해보자고 말했다.' 는 원래 3년전에 썼던 매거진의 골격을 현재 버전으로 다시 쓴 책이에요. 놀라운 건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죠.
궁극적인 것은 같지만... 이 책은 브랜딩의 시발점을 언급하지 않아요. 오히려 위에서 말했던 7단계중 4번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메시지가 있다는 가정하에!~ 그것을 어떻게 극대화시키거나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랄까요.
실무자가 메시지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대표님 이게 생각하시는 그게 맞아요 아니에요!!?' 라고 금도끼은도끼 퀘스쳔 대파티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계속 시각화시켜서 '대표님 말씀이 사실 굉장히 전우주적인 진리에 가깝다.' 라는 걸 인지시켜주거나.
잘 정리되는 듯 했지만... 다시. 그 외에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은 사실...대표님의 결단과 선택의 문제죠. 그래서 메시지는 옳다그르다가 아니라 있냐없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정말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많이 바뀌었네요. 이게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뭔가 뚜렷한 공식이 있는 분야가 아닌지라. 일을 하면서 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한 욕심도 함께 섞였을거예요. 앞으로도 저는 쭉쭉 성장하겠지만 일단 ...지난 5년을 돌이켜보니 제가 생각했던 브랜딩은 이러했습니다. 내년이 되면 이불킥이겠죠. 그 땐 비공개로 돌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