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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Aug 27. 2021

범죄자의 리더십, 그런데 이제 사업수완을 곁들인.

이런 디테일로 사업을 했으면 티타임즈에 소개됐을텐데.

<고객 세그멘트>


생각해보면 이 사기꾼의 비즈니스모델은 꽤나 훌륭했던 것 같다. 이들은 일단 고객 세그멘트를 정확하게 나누었는데 딱 봤을 땐 30대 초중반 정수리 모발의 힘이 점점 없어져가는 여성들을 타겟으로 했다. 이들은 다이슨 에어랩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절박함이 얼마나 큰 지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2030, MZ세대, 의류구매에 고민하는 사람들..따위로 고객을 정의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해선 사기를 칠 수 없다. 2030이면 21살부터 39살까지 거의 20년을 넘나드는 인생들인데 생수나 김치비즈니스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들에게 같은 메세지를 줄 수 있단 말일까. 사기꾼들은 고객의 모발상태까지도 명확히 규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금액 책정>


당근마켓에서 이것이 매물로 나왔을 때 35만원인가? 그랬었는데. 시중가 대비 15만원이나 저렴한 금액이었다. 미개봉/박스포함이라는 게 지금 생각하면 꽤나 수상한 포인트였는데, 일반 에어랩을 사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튜브에서 그 성능을 간접체험하고 난 뒤라 그런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명문구에 

'어찌어찌해서 급처분하려는 데 제가 지방 멀리 살아서 할 수 없이 가격을 낮추게 되었다.' 

라고 가격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해놓기까지 했더라구. 누가 당근하면서 문구를 하나하나 뜯어보겠어. 지방, 급처분, 어쩔 수 없이.. 등의 단어가 먼저 눈에 띄게 만드는 거지. 

 '지방, 급처분, 어쩔 수 없이..' = 낮은 가격


이들은 단순히 원가에 유통비를 더해 가격을 책정하지 않는다. 프리미엄으로 포지셔닝하고 싶어서 떡메모지와 에코백을 곁들인 터무니없는 가격의 패키지를 내놓지도 않았다. 


솔직히 막 반값이거나, 40만원 정도였으면 오히려 고민했을 거야. 너무 싸면 수상했을 거고, 우리 동네가격과 별 차이가 없으면 동네에서 샀겠지. 


이 소리는 사기꾼놈들이 매물의 시중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사람들의 심리적 허들이 낮을 만한 가격선을 선택했단 얘기거든. 가격과 심리적 저항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이고, 이 자식아 그 머리를 ...좀)

하..나 참..


<고객 응대>


법원 놈들은 전화해서 얘네들은 어케돼요? 우리 돈은 받을 수 있어요? 등을 물어보니 뭐라뭐라 얼버무리더니, 결국 '나도 잘 모르겠다' 고 하더라. 아니 니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단 말이니? 라고 되묻고 싶었다. 얼탱이가 없어서...


하지만 사기꾼은 그러지 않는다. 사기꾼은 존나 상세하게도 결제방법에 대해 설명해준다. 이 놈은 일단 당근에서 나와서 카톡으로 들어오신 후 자기가 주는 링크에 들어가 어떻게 로그인을 해서 어디에 어떻게 결제를 해야 하는 지 진짜 꼼꼼하게 설명해주더라. 


처음 겪는 결제루트였음에도 1도 이상함을 못느끼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 보면 이들은 진짜 유저시나리오를 많이 연습해보고 섬세한 UX기획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품섞인 응대를 하거나 고객불만에 일관된 복붙메시지만 답변하거나, 그건 저희 책임이 아니라는 식으로 칼답하고 끊어버리거나, 이건 고객님이 물에 빠뜨리신 거 아니냐고 의심부터 하는 여타 서비스CS와는 차원이 달랐다.


<디자인의 디테일>


하아..이건 좀 굴욕스러운데...


난 디자인을 하는데도 그들이 만든 가짜 네이버화면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아..? 어?........... 이거 왜 색이 좀 다르지? 

이게 보였다. 지금보면 정교하게 디자인도 아니야. 뜯어보니 좀 대강한 흔적들도 있고, 뭔가 안맞는 구석들이 있는거야. 근데 내가 놀란 건 뭐냐면.. 이들이 '어느 부분에 신경써야 고객들이 이걸 네이버라고 느낄 지'  알고 있었다는 거지. 


이들은 불필요한 내부 콘텐츠(눈이 잘 가지도 않는 곳들)는 대충 만들었어. 대신 로그인화면과 결제화면은 꽤나 그럴싸하게 꾸며놓은 거야. 특히 사람들이 뭔갈 입력하거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부분은 거의 똑같이 만들어놨더라고. 근데 나머지 시선이 흘러가는 영역들은 지금보니 개판이야.


뭐랄까. 쓸데없는 데 힘쏟고 돋쏟느라 정작 중요한 디자인디테일을 놓쳐버린 몇몇 서비스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지. 고객의 시선이 어떻게 이동하고 어디에 머무르고, 무엇을 누를 때 집중하는지 정말 면밀한 UX설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이들은 사실 가끔 모여서 구글 컨퍼런스같은 걸 듣고 스터디하는 건 아닐까? 


<섬세함과 근성>


이건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주요 고객이 여성인만큼 이들은 프사과 배경사진에도 신경을 쓴거야. 지금 다시 보면 프사와 배경사진이 묘하게 이질감이 있는데, 사실 우리네 삶도 그리 맥락있진 않잖아. 프사엔 아이사진을 걸어놨어. 이게 진짜 대단하더라고. 보통 아이엄마들은 자기 사진을 잘 걸지 않거든. 백퍼 엄마프사인거야. 배경도 아이와 어지러인 아이방 사진을 걸어놨어. 하아..진짜 미친. 


더 놀라운 건 그걸 응대한게 엄마가 아니란 거야. 사기꾼은 남편역할을 수행했어. 와.........아이있는 엄마들은 당근채팅을 하지 않아. 모든 거래는 남편이 하기 마련이지. 이 사기꾼은 당근찐유저일 수 있겠다 싶더라고. 참..사기를 치려면 이렇게 서비스에 대한 특징과 유저특성까지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구나 느꼈다. 


사업한다고 시장이나 플랫폼, 유저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냥 자기 프로덕트하나만 믿고 뛰어드는 무모함도 없었고, 정확히 이 플랫폼의 사용방식과 고객들의 어떻게 행동하는 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우리를 사기치고도 계속 다른 계정으로 에어랩, 공청기, 음쓰처리기 등을 판매하고 있더라고. 주부들의 3대이모님 가전은 물론 정말 누가봐도 이건 못참는 아이템들을 위주로 사기치고 있었어. 

 

<그 와중에 리더십>

근데 이 놈들이 보니까 피의자 구모씨와 공범이 6명이 있더라고? 아니 내 회사보다 멤버가 많잖아? 뭐랄까... 미움과 함께 애절함도 느껴졌어. 하아.. 6명을 데리고 이걸 운영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빡치는 일도 많았겠지. 고민과 함께 소주를 들이킨 날도 있었을거야... 구모씨 당신은 대체. 초기스타트업 수준의 크루들을 데리고 어떤 Exit계획을 세웠던거야. 


아마 한 명은 디자이너였을거고, 한 명은 개발자였겠지. 두 명은 고객응대를 담당하고, 한 명은 계정생성과 해킹같은 걸 담당했을 거야. 한 명이 은신처제공 리더인 구모씨가 수금과 PM역할을 했겠지. 아마 이놈들도 디자이너랑 개발자랑 싸우고 그랬을거야.. 개발자는 계속 '그건 못한다.'고 했을거고... CS담당은 30분마다 담배피러 갔겠지. 결국 나란히 잡힌 거 보면 한 곳에 모여있다가 일제소탕됐던가 아니면 줏대없이 거처를 줄줄 불었을 지도 몰라. 우리 돈은 못받겠지만... 여튼 짧은 시간이나마 Revenue Model이 작동하는 걸 보면서 가설검증을 하셨으니 출소하시면 또 사업을 하시겠죠. 


여러가지 영감을 얻는 시간이 되어 즐거웠고 담번에 만나면 지옥으로 보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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