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창선 Jun 18. 2022

컬쳐덱은 어떻게 팀을 무너뜨리는가.

잘못된 컬쳐덱은 팀을 찢어.

<우선 망한 이야기부터>


컬쳐덱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구성원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의 핵심가치와 고객들을 대하는 태도, 일하는 방식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었으며 그에 대한 토론을 나누어본 적도 없었다. 대표와 이사, 인사팀의 팀장급만이 컬쳐덱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컬쳐덱은 소수의 욕망을 대변하는 사문서가 되어갔다. 더욱 놀라운 건 한참 열정적으로 컬쳐덱에 임하던 대표가 갑자기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으면서 발생했다.


2개월차가 되던 무렵 대표는 다른 사람에게 프로젝트를 위임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 대표는 볼 수 없었다.) 위임받은 담당자는 대표와 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대표는 며칠간 묵묵부답이고 나는 구체적인 합의문을 요구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간담당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어야 마땅할 일이다. 우여곡절끝에 결과물은 만들어졌고, 구성원들의 피드백을 받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구성원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피드백이라기 보단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부었다. 또는 아예 응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들에게 이 컬쳐덱은 원치 않는 브로콜리를 입에 쑤셔넣는 듯한 경험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 이후 팀원과 임원진은 사이가 틀어졌고, 컬쳐덱 담당자는 바뀌었으며 새롭게 배정된 담당자는 이 프로젝트를 전혀 모르는 신입사원이었다. 팀장들은 대표를 욕하며 팀원들 달래기에 여념없었고 담당자는 뭣도 모른 채 죄송하다는 소릴 연발해야 했으며, 대표는 잠수를 탔다.


결국 신입 담당자는 뒤에 숨은 대표 대신 프로젝트 중단요청을 전해왔고 그렇게 컬쳐덱 프로젝트는 사라졌다. 내부에선 그 프로젝트가 곧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대표와 이사진의 책략정도로 여겨졌나보다. 컬쳐덱의 존재여부를 알게된 나머지 구성원들은 서둘러 그들에게 대항할 메시지를 전달했고, 말이 나온김에 옛날 이야기까지 꺼내고 희망사항까지 늘어놓았다. 모든 팀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컬쳐덱이 행복한 동화책처럼 보이는가?>


우리는 구성원들에게 녹아드는 컬쳐덱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자주 사용하며, 읽고 따라주길 바란다. 하지만 예상했다시피 그들에게 컬쳐덱은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대충 눈치껏 관습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쉽고 편한 것은 없다. 기존 룰을 우회적으로 회피하는 것만큼 짜릿한 것도 없다.


기업들이 좋아하는 3대 인재상(이를테면 도전, 열정, 혁신같은)은 너무도 거대해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인 규율들도 적당히 피해갈 우회로가 있기 때문에 그간의 '사내규정'은 개인들에게 큰 허들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컬쳐덱으로 세부적인 행동양식까지 가이드라인을 잡는 순간, 그들에게 컬쳐덱은 불편함의 대상이 된다.


기본적으로 컬쳐덱은 강압과 약속, 상과 벌에 대한 기준을 명시한다. 명문화란 그런 것이다. 겉보기엔 단순히 정보가 적혀있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자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는 전승과 전파의 목적 때문이다. '왜곡되지 않는' 정보를 다수에게 전달하며 모두가 동일한 배경지식을 갖게 만든다. (여기서 끝나면 행복한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 명문화된 정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평가의 기준이 되고, 구성원들의 행동은 검열의 대상이 된다. 나쁜 경우, 이는 저항적 친밀집단을 만드는 근간으로 발전한다. 이게 무슨 문제를 만드는 지 이해하려면 친밀집단이라는 개념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친밀집단은 이름과는 다르게 친밀함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친밀집단이란 단순한 감정적 친밀함을 지닌 우호적인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조직의 룰을 해치는 사일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집단을 형성하는가?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너무 큰 자유가 주어졌을 때 또는 명문화된 규율이 없을 때, 역할과 자유, 책임을 갖기 위해 스스로 집단을 형성한다. 무한자유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작은 울타리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집단의 힘과 시스템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에 속하려고 한다. 이는 분명 복합적이지만 회사에 소속된 이유 또한 이런 소속본능의 일종이다. 소규모의 회사는 집단의 울타리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또 다른 친밀집단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적다.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집단이 커지고, 개인이 느끼기에 본인이 속한 조직이 사회와 같은 '열린 세계'처럼 여겨지면 그는 조직안에서 다시 방황하게 된다. 이내 또 다른 집단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조직 내 조직이 발생한다. 큰 범위의 사회와는 달리 회사 내에서의 조직형성은 회사가 추구하는 규율, 가치와 충돌할 가능성이있다. 이 때 개인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친밀집단을 포기하고 조직의 규율을 따르거나, 방관자가 되거나, 다음 나오는 저항적 친밀집단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음은 규율이 있을 때의 친밀집단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공포와 불안에서 탄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조직에 기여하는 바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그것을 평가절하하는 경우, 또는 제안된 규율속에 내가 수긍/이해할 수 있는 가치가 없을 때 친밀집단이 발생한다. 마치 방황하는 이들의 쉼터와도 같다. 규율이 없을 때와는 달리 현재의 불합리한 규율(그의 입장에서)를 벗어나 신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위에서 찍어내리는 메시지가 자신에게 불안과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안정감있는 조직을 만들어 위안을 받는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이란 직접적인 위협이나 압박이 아닌, 잠재적인 갈등까지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큰 불만이 없지만 내가 저 문화에 부합할 정도로 잘 성장할 수 있을것인가?'와 같은 먼 미래의 불안 또한 개인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트리거가 된다. 누군가는 더욱 열심히 노력해 집단에서 인정받으려 하겠지만, 누군가는 하루라도 빨리 조직과의 심리적관계를 끊어내며 그곳의 룰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거리두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직내 고요한 방황이 시작되고 이들이 모인다. 이 친밀집단은 합리적인 관계보다 부정적 감정의 라포로 묶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매우 크다. 문제는 이 친밀집단이 상위메시지에 대항하는 조직이 된다는 점이다. 저항적 친밀집단의 탄생이다.


초기엔 싹을 자른다는 이유로 이 저항집단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금지령을 내리거나, 인사배치를 달리하거나 면담을 하는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강제력에 와해된 저항적 친밀집단은 조직 내로 더 깊숙히 숨어들어 레지스탕스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회사의 룰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인지를 역설하고, 자신이 그 피해자였고 실제로 어떤 조치를 당했음을 설파한다. 매우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실제 그들이 내뱉는 말은 일상적이고 심플하다. 예를 들면 '뭐래는거야.' 정도랄까. 이게 우습고 작아보이는가? 이 한마디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하다. 개인에게 사소한 불안을 심어주면 개인들은 그것을 빌미로 친밀집단을 형성한다. 불안에 기반한 친밀집단 내에서 맥주가 더해지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 지 우린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합의하는 게 좋다. 하지만 안된다면 흉내라도 내라.>


때문에, 컬쳐덱을 제작할 땐 구성원들의 합의와 참여가 필요하다. 당연한 얘기다. 자신이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어야 하고 회사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회사의 주요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의 시간을 지니며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렇게 모인 하나의 소실점을 기록하는 것이 컬쳐덱이다. 땀흘려 합의한 내용. 내가 그 소실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고 다른 동료와 함께 애썼는지를 인지하는 순간, 주변 동료들과 전우가 되고 소실점을 내가 수호해야 할 북극성이 된다. 이게 맞지. 이렇게 하는 게 이상적이지.




그러나



이게 가능하다고?
저 문장 중 어디 하나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곳이
과연 몇 군데나 있을까.


실제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회사는 많지 않다. 구성원이 너무 작다면 컬쳐덱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100명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의견을 취합하기 쉽지 않다. 단순히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합의를 끌어내는 데에는 속도와 위트, 회유와 기만책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의 적극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걸 알고있다. 적절한 답을 찾으려고 하거나 최대한 함구하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제한된 시간, 부족한 인력, 불완전한 시스템과 인간적인 번뇌가 곁들여지면 전사적 합의라는 건 꽃나라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되는 것이다.


대외적 위협이 있고, 회사의 사정이 급박한 때라면 계엄령처럼 강압적인 제도개편과 참여종용이 가능하겠지만 이와 같이 평화로운 호시절에 그런게 가능할리 없다. (참고로 그렇게 사정이 급박한 때에 컬쳐덱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린 기만책을 써서라도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기만이란 단어가 몹시도 악랄하게 느껴지는가.


애석하게도 컬쳐덱의 존재자체야 말로 실상 압박스러운 것이 아니었던가. 컬쳐덱은 온전히 회사를 위한 룰을 선포하고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집단의지의 상징이다. 좋은 말로 했을 때 문화고 가치지, 구성원에겐 결국 따르지 않을거면 선택하라는 메시지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우린 묵직한 메시지를 쉽고 유쾌한 문체를 풀어내며 그들이 한 눈에 이해하길 바란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이 명문화된 문화에 부합하는 지 아닌지 검열할 수 있도록.


때문에 이런 자료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설픈 진정성은 잠시 내려놓도록 하자. 여러분이 진정성을 발휘해야 할 때는 따로있다. 글의 제일 마지막에 그것을 적어보겠다. 여러분이 누구이든 이 프로젝트의 구성원이라면 여러분은 극단적인 사측의 입장이 된 것이다. 구성원들이 잠자코 따라준다면 기꺼이 감사하자. 하지만 구성원이 상당히 많아졌다면 그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이끌어낼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만약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줘야 하고, 척이라도 해야한다. 그리고 들키지 않아야 한다. 이 표현들이 몹시도 불편할 수 있겠다. 책상 앞에서 음흉한 표정으로 구성원을 교묘히 속이는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쉴 틈이 없을 것이다. 느낌과 경험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한가. 요지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제약에 막혀 합의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라. 흉내라도 내라. 이 과정이 스킵되는 순간 여러분이 만드는 컬쳐덱은 머지 않아 재활용도 힘든 종이로 분류돼 지구를 오염시킬 것이다. 합의를 잘 안된다면 아래 문장을 보자. 이상적인 윗 문장을 당신을 위해 다시 재해석한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었다는 느낌을 줘야 하고, 회사는 그 약속을 선택적으로 지켜야 한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회사의 주요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여기게 해야하고 치열하게 고생시켜 뭐라도 한 것 같은 땀방울을 흘리게 해야 한다. 내가 뭔갈 적었고, 그게 반영됐고, 다 같이 모여 인상깊은 이벤트 따위를 했다는 느낌을 줘라.

그 과정이 엉성해도 괜찮다. 완벽하게 체계적인 방법론을 만들려는 중인가. 물론 좋은 시도다. 그러나 그게 완성되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말자. 사내 문화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하지마라. 왜 우리가 이런 가치를 도출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들이 입사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가치이다. 대신 새로운 변화에 일조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그런 액션을 유도하자. 빡센 설문, 거대한 워크샵, 긴 레포트, 뭔갈 쓰고 붙이고 대화하고 대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시간제한을 두고 정신없이 진행되어야 하며, 자주 그리고 힘든 시간이 되어야 한다. 컬쳐덱이 단기적으론 좀 몸에 안맞는 옷처럼 불편할 수 있음을 인정하자.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생존, 성장, 상장하려면 이 방법밖엔 길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결과물이 허술하게 나왔다고 울상짓지 말자. 실제 결과물은 깔끔한 문장이 아니다. 허덕거리며 고생했던 그들의 시간이 우리의 결과물이다.


<고생시켜야 한다>


컬쳐덱을 만드는 당신의 땀방울을 구성원이 알아줄까? 그들은 일말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땀방울은 구성원이 직접 흘리게 만들어야 한다. 자, 기억을 더듬어보자. 여러분 기억 속 행복했던 동남아 해변 여행을 한 마디로 정의해보자. '좋았어'정도 이외의 감상이 더 있는가. 그럼 반대로 정말 진이 몽땅 빠지도록 고생했던 여행을 떠올려보자. 배낭을 메고 얼마나 위험한 곳에서 영화같은 상황에 처했었는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썰을 풀게 될 것이다.


두뇌는 평화로운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상태'일 뿐이니까. 대신 고생과 위협이 될 만한 기억은 오래오래 남긴다. 그건 '정보'이기 때문이다. 컬쳐덱이 작동하게 만들고 싶다면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몹시도 고생해야 한다. 고생의 정도는 짜증의 수준을 훨씬 넘는 것이어야 한다. 몇 백명이 넘는 구성원이 모두 참여할 수 없다면 회사에 가장 불순응적인 예비 레지스탕스들부터 고생시켜야 한다.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고 의견을 취합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이 멋진 걸 선포하게 시켜야 한다.


사실 그 모든게 대표님의 생각이고 지향점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그렇게 느껴서는 안된다. 그래서 100% 반영은 안되겠지만, 100% 참여는 필수다. 이 과정이 없다면 컬쳐덱을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팀을 와해시키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일방적인 메시지처럼 보일 것이고, 구성원들은 불편해질 것이다. 컬쳐덱은 외면받을 것이고 구성원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싶은 피플팀은 결국 컬쳐덱을 노션 한 귀퉁이 첨부파일 정도로 숨겨놓을 것이다. 임원진이 자신들에게 불편한 뭔가를 시도했다는 걸 알게된 구성원들은 이후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더욱 부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컬쳐덱은 관계를 건드리는 일이다. 고작 몇 십페이지짜리 문서나 만들자고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이것은 신중해야 하고 본격적이어야 한다. 과정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에 집착하지 말자. 과감하고 거칠어도 된다. 때론 기만하고, 술책을 쓰고, 쇼를 해야할 때도 있다. 컬쳐덱은 선포와 선언을 위한 시발점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건 선포 이후다. 그들의 환호와 인정을 받았는가. 그들의 손에 컬쳐덱이 잘 들려있는가. 우리가 진짜 진정성을 내비쳐야 할 시점은 바로 이 때부터다. 쓰여진 약속을 지키고, 실천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컬쳐덱 TFT의 진짜 역할은 지금부터다.




매거진의 이전글 30분 만에 회사소개서 스토리짜기!! 시작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