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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ZY Jul 09. 2023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태풍의 눈처럼 잔잔한 고요함이 더욱 무서울 때가 있다. 말 없는 자의 생각이 더욱 매서울 수 있고,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의 성실함 또한 언젠가 뒷심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조용하게 꾹꾹 눌러온 감정에 대해서는 언젠가 터지는 날도 반드시 온다고 믿는다. 



‘싱그러운 초록에서 검은 초록으로 몸통을 바꾸고 매미 울음이 애가 타도록 그악스러워지면 여름의 복판이라는 걸 실감했다.'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언어에 스며들었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탓에, 식구들의 테두리가 되어주고 있었던 주인공 여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선택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일하게 숨통을 트이는 순간은 시를 쓰거나 반지가 담긴 상자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그를 그리워하는 시간이었을테다. 그녀에게 그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나도 소설을 읽는 내내 옆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나는 주인공 여자가 그를 이용해서라도 얽매인 일상을 박차고 나올 탈출구의 기회를 좀 잡아보라고, 그녀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녀의 심리가 담긴 문장들을 읽었다. 다음 생에는 시인의 애인으로 태어나고 싶은데 이번 생에서는 어떻게든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응원하면서 말이다. 



모든 감정은 지나고 나서야 그만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해석되는 것 같다. 스쳐만 가도 언젠가 나만의 언어로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도 최근에 더욱 일상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류장'이라는 단어가 여러 생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삶의 종착역을 우리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어쩌면 그 종착역이 불현듯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장 내일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불의의 사고로 생을 급히 마감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삶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일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한때는 그런 상상도 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을 보면서 나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더 열심히 살아봐.'하고 기회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ㅡ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비록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자잘한 살림들이 나의 시간을 장악할지언정 그 시간을 빼앗아 갔다고 누군가를 탓하고 나를 갉아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피어나야 할 꽃일지 모르니까. 


언젠가 맞닿을 불확실의 종착역을 위해 지나가야만 하는 수많은 정류장을 온 마음으로 더욱 느껴보아야겠다. 정류장과 다음 정류장 사이의 풍경도 좀 더 자세히 보고, 느리든 빠르든 그 속도도 인정하면서 유유히 지나가 보는 거다.


여정의 순간에 대해 더욱 나 스스로 정성을 쏟아 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나를 애정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아닐까? 


"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이팝나무 이파리에 관해. 거짓말처럼 맑았던 그날 새벽하늘을 지나갔던 검은 새 한 마리에 대해서. 아무도 울지 않았던 그 밤에 대해서. 엄마의 꽃무늬 블라우스에서 맡아지던 나른한 살냄새와 동생의 품에서 꼬무락거리는 스무 개의 손가락과 스무 개의 발가락에 대해서. 그 손과 발이 잡아당긴 생의 끈질긴 얼룩과 여름 소나기에 대해서, 그 소나기 끝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 대해서. 그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길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와 나의 눈물과 우리의 정류장과 모두의 무덤에 대해서. 서로의 체취로 속삭이던 노래와 지리멸렬한 계절에 속박되었던 오해와 피우지 못한 꽃과 기꺼운 약속과 작은 책상과 낡은 베갯잇과 차마 다하지 못한 희망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해서.

ㅡ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나는 오늘도 그들의 언어를

자꾸 읽고 써본다.

나의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습득하기 위해 

꾹꾹 눌러 담아 볼 뿐이다. 

@RO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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