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에게 느껴지는 중량감과 타격감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키쿠치 린코, 찰리 데이, 로버트 카진스키
정보: SF | 미국 | 131 분 | 2013-07-11
이 영화의 예고 편이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나오면 항상 단 한번의 의구심도 생기지 않고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아류가 아니냐는 욕도 들어먹은 영화지만 설사 아류라는 욕을 듣는 영화라도 내가 선택하는 데에는 감독이나 제작자, 각본가가 누구냐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보고 말았다. 디워라는 폐기물에 가까운 영화도 그 때문에 본 적이 있었지만서도......
결론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돈이 아깝지 않다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 정도의 새로운 영상적 경험을 이 영화는 나름 풍부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단연코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보다 내가 조금은 더 영화 관객으로서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엄청난 씬들을 제외하고서는 스토리나 기타의 감성적 디테일에 있어서는 약점을 갖고 있고 유머감각도 매우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적 성공에 있어서만큼은 성취한 바가 많기 때문에 80점 이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참여했다면 일단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심이 생긴다. 블레이드 2, 헬보이 1/2와 판의 미로 등의 영화를 케이블 채널에서 가끔 만나서 볼 때마다 장면 장면들이 과연 어떤 새로운 세계에서 전달이라도 되어 온 것처럼 나름의 깊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독창적이고 새롭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의 색깔과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리스트 감독인 잭 스나이더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다크 하면서도 독특하다.
감독에 대해서 몇 가지 검색을 해보니 그가 영화를 구성하는 이미지나 상상력을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들 그중에서도 다크한 이류급 정도의 소재들이 그의 영감을 많이 개발시켜주었던 것 같다. 이것은 워쇼스키 형제들의 상상력에 발을 달아 만들어진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일본 만화 "공각 기동대"의 스타일과 착상들이 많이 차용된 것과도 비슷한 양상일 수 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일본 괴수 만화와 로봇 영화를 잔뜩 보고 자랐을 "나"나 그것에 집중했던 감독 길예르모씨의 만남은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은 나와 비슷하거나 위 아래로 10여 년 차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수많은 남녀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흥행은 엄청나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가서 앉아 보는 순간. 트랜스포머에선 드러나지 못했던 그 거대함과 중량감, 그리고 서로 싸울 때 내치는 느낌들이 저 앞의 스크린에서 나에게까지 와서 느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일단 80미터에 육박하는 로봇의 거대함이 스크린을 가득히 채우고.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넘어질 때 극장이 흔들거리는 상상이 이뤄질 정도였다. 커다란 괴수들의 모습에서 받을 수 없는 현실감은 고스란히 움직이는 로봇의 각종 작동 장면들에서 하나 하나 체감이 되면서 좀 더 확고해진다.
어둡고 비 내리는 화면 또는 어두운 심해 등지에서 CG 상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씬들이 나와 비주얼의 구석구석을 다 살피기는 어렵다. 유조선 같은 큰 배를 칼처럼 들고 가서 괴수를 후려치는 장면처럼 포인트 포인트별로 "우와 대단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나온다.
로봇들이 주연 배우들인 영화이기 때문에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비슷비슷한 비중으로 여기저기에서 아주 당연하고 진지한 연기를 하다가 비장미와 더불어 인류를 위해 희생하기로 작정한 몇 명은 사라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남녀 둘의 모습이 모종의 기쁨이나 매력을 주기에는 매우 부족해 보인다. 그림이 안 나온다.
안타까운 부분은 흥미를 끌어야 했을 여주인공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이는 여배우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여배우의 배역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해서 과거 시점에서 연기할 아역 배우도 등장했는데 이 아역 배우의 매력이 100 정도여서 모든 관객들이 매료되었다면 화면이 다시 영화 속 현재로 돌아왔을 때 관객들은 왜 그 아이와 이 여배우가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며 0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런 생김새의 여성이 길예르모 감독의 눈이나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섹시하거나 예쁜 동양 여자의 이미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흥행의 1-20퍼센트는 이 배우 하나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을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 수 있는데 만약 일본에서조차 이 때문에 흥행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밝혀진다면 분명히 패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쁘냐 안 이쁘냐의 문제보다 흡입력의 문제다.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이 영화는 흥행 난조를 겪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을 짙게 받은 이 영화가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왜 실패했을까? 우리나라의 "괴물"도 일본에선 맥없이 주저 앉았다.
일본이 특촬물의 원조라는 자부심도 무시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만 이른바 괴물의 경우에는 "가족"코드나 고질라로 대표되는 괴수물에 대한 심드렁함이 영화 흥행을 막은 부분이었다고 한다면 퍼시픽 림의 경우에는 일본 남자들의 자존심을 석죽이는 근육질의 조종사들의 모습 내지는 존중받기에는 충분히 유명하지 않는 주인공들이라는 요소와 일본 관객들 조차도 매력적으로 볼 수 없는 여주인공의 모습도 흥행 실패의 분명한 한 부분인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매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액션 블록버스터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서양인들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취향에 기준을 두고 아시아 여주인공을 영화에 픽업한다면 아시아에서의 흥행은 그러한 종류의 작품에서는 꽤 저조해질 확률이 높아지기만 할 것이다. 퍼시픽 림의 또 하나 슬픈 점은 미국에서의 흥행 순위가 한국에서보다도 더 떨어졌었다는 점이다. 그럼 취향의 문제마저 떠난 건 아닌가?
이에 자극을 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흥행은 제작비에 비해서 꽤 괜찮았는지, 퍼시픽 림 2는 촬영에 들어간 상황이다. 배역과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이 그대로라면 그냥 거대 로봇들을 보기 위해서만 기다려야 할 듯 싶다. 로맨스가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 그런 타입의 액션 영화로서 퍼시픽 림 자체는 아직도 나에겐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