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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l 31. 2018

<골든 슬럼버>-느껴지지 않는 감동

매끄럽게 잘 만들어졌으나 있어야 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출장을 오게 되면서

비행기 좌석 앞의 스크린을 보면서,

과연 어떤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까

앞의 화면을 놓고 앞 뒤로 다니며

나름 고민을 했다.


예고편도 찾아보고, 간단한 요약

설명도 여러 번 봤지만, 도통

고를만한 영화가 나타나질 않았다.


그만큼 이제 개봉 시점 이후에 가까운

영화나 보고 싶은 화제작을 비행기에서

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 것이다.


유료 다운로드나 IPTV, 스트리밍

서비스로도 볼 수 있는 작품이

그저 떡하니 눈 앞에 있는데,

짧으나마 잠을 포기하고 볼만한

그런 무게감을 가진 영화가 없었다.


'골든 슬럼버' 가 눈에 들어오고

강동원의 모습이 나름 활기 있는

스토리를 보여 주지 않을까 싶어서

눌렀는데, 누르고 나서 30분쯤

뒤에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


애정을 담아서 본 작품에는 통상

여기저기 찾아서 사진을 붙여놓고는

하지만, 이 작품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일 힘도 생기질 않는다.


1. 일단,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므로 예상할 수 있는 분재화된

감정의 파장이 화끈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극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분재화 된'이란 표현은 어쩌면 나만의

표현일 것이다. 극화에서 이렇게

나와야만 한다는 인간의 감정 표현이

한정되고 가지치기된 느낌을 내가

여러 일본 영화를 보면서 느꼈기

때문에 만들어진 표현이다.


물론,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빼고, 중요한 어떤 부분만

남겨 놓는, 편집의 치밀함이 일본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라는 의아함을 보는 내내 준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지만, 정말

인간을 저 정도 선에서만 이해하면

충분할까 싶은 싱거움이 가득하다.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은

일본 원작을 다시 한국화 해서

개봉한 작품으로 흥행 면에서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원작을 보고 나서, 리메이크작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원작의 내용을 보고서, 저렇게

진지하게 이웃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대신 살인을 할 수 있을까라는

납득과 이를 수긍해야 올 감동에

전혀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분재화된 인간성에

의례적으로 감동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를 가진 곳이 일본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감동하면서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수용 흥행작이란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해서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은 "올드보이"다.

이 작품이 실상 성공한 것은

"통속성"을 강화하고, 마무리의

싱거움을 "의도치 않은 근친상간"

이라는 커다란 파국으로 마무리

했고, 구석구석에 원작 만화에는

없는 스타일리시함과 유머를

꼼꼼하게 배치한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의 아기자기한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에 나오는

치밀함은 우리나라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조리법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질 확률이 높다.


그와 같이 "골든 슬럼버" 원작을

보지 않았기에 비교를 할 수는 없으나,

원본부터가 초반의 파격적인

"대통령 후보"를 암살한 누명을

쓰게 되는 장면을 빼놓고는

반전이나 기가 막힌 스토리의

전환 같은 자극 점이 분명히 옅은

작품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제대로 화끈하게

한국화 하지 못한 것이 이 영화가

큰 흥행을 낳지 못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가 노리는 감동에 정말로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2. 일본 사회가 가진 정치적인

서열화와 수직성, 일반 국민

중에 누구든 희생양을 만들어

범죄자화 할 수 있는 사회다라는

"사회적 악"에 대한 저항에도

동참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더 부당하고,

더 거대하고 추잡한 조작과

은폐가 벌어져왔고, 그것이

이미 모두가 아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윤계상이 연기한 배역은

결국 정부 기관에서 사람을

죽인 뒤에 이를 일반인의

범죄로 조작하는 일을

해왔지만, 자신의 오랜

친구인 강동원의 배역에게

이 같은 누명을 씌우게 된

것을 괴로워하다, 그를

도망치도록 만들고서는

친구를 대신해서 죽는다.


거대한 조직 안에서 생존해온

회사원 일을 오래 해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와 닿기가 쉽지

않은 설정이다.


죽음까지 무릅쓰고 다른 친구를

위해 조직을 배신할 정도의

각오를 했다면, 그전에 강동원에게

이 일과 연관되지 않게끔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자신도 어딘가로

밀항이라도 할 방안을 마련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들켜서 죽임을 당하거나

나중에 택배 탑차를 몰고 주차장

위로 올라가 혼자 폭사를 당하거나

어찌 되었든 결과가 같을 상황이었다면

그는 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시간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치밀하고

똑똑한 친구였다면, 오히려

말끔하게 친구가 죽는데 일익을

담당해서 조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데 더 집중했을 것이다.


4. 이 영화는 결국 같은 밴드에

속해서 우정을 나눈 친구가 서로

도우며, 억울한 누명을 쓴 친구를

자신의 생활 수단을 잃을 각오를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길 위험을

감수하고 구해낸다는 스토리를

전달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각의 배역이

보여주는 진한 우정이라든가

세태와는 잘 맞지 않는 서로 간의

끈끈한 믿음이라는 인간과 인간 간의

강력한 결속감과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진지함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면, 그건 각각의 배역이 정말로

이 시대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강동원을 유혹해서

살아왔던 기관 소속의 동거녀와  

거주하고 있는 말끔한 아파트의 모습은

택배 기사의 고단하고 여유 없는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데도

그대로 나오고 있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경고에 따라

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날 때

의구심을 갖고 쳐다본 이 동거녀는

갑자기 다리를 높게 뻗어 강동원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얼마 안 있어

그대로 테이블에 내팽개쳐져 제압

당하는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함께 살아온

여자를 일순 의심하고 테이블에

내팽개치는 강동원의 배역이

그 이후에 아무리 인간다움을

보여주려고 해도 낯설어 보이는 건

이 엉성한 장면이 주는 무의식적인

효과가 커 보인다.


5. 윤계상의 배역이 건네준 연락처를

통해서 만나게 된 예전의 기관 요원

배역의 남자는 엄청난 완력과

작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초고수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강동원과 자신의 처자식을

맞바꾸려고 하지만 이내 기관과의

협상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고

강동원의 결백함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다가 결국에는 죽게 된다.


어찌 보면, "골든 슬럼버"라는 곡을

같이 연주하면서 싹튼 우정과

사랑을 가진 친구와는 다르게

유대감의 정도가 약한 사람마저

이렇게 목숨을 거는 것의 필연성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왜, 앞 서의 윤계상 배역이나

이후의 이 초고수나, 중간에 자신이

오픈한 가게에서 강동원 배역으로

성형수술을 한 남자에게 목숨을

잃는 친구나 주인공인 "강동원"을

위해서 당연히라고 할 정도로 희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인지가

내내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6.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극화가

이런저런 등장인물의 죽음에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강동원은 하나의 상징적인

대의, 곧, 조작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단당하는

나나 다른 누구와 같은 일반적인

시민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야만 했다는 당위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당위가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제 그 이유가 이 영화가

내게는 왜 실패한 작품으로

보이는지를 정확히 설명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상업영화는 결국 주인공 등의 인물에

대해서 통상적으로는 3가지 심정적

동의를 구하기 위한 전략을 쓰게

되기 마련인데.


A. 선망의 대상 (멋지다 훌륭하다)

B. 동일시의 대상 (왠지 나와 같은데)

C. 연민의 대상 (하이구 불쌍해라)


이 영화 속의 인물은

이상하게도 이 세 가지의

범주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길이가 남다른 미남이 희생자

노릇을 어설픈 설정에 따라 순진한 척

열심히 하고 있는데, 관객이 도대체

그 인물을 어떻게 선망이나 동일시,

연민의 한 대상으로 느낄 수 있을까.


그가 결과적으로는 친구와 더불어서

반전을 통해서 승리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능력보다는 전적으로

친구와 초고수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고마움도

언급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성공적으로 반전을 통해서

일거에 비현실적인 문제 해결이

나오고, 모두 모여서 음악을

들으며 막을 내리는 장면에서

우리는 희생을 당했던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을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요즘 영화에서는 일상화된

건조한 상황을 다시금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일상화된 상황이

적어도 이 영화에서 반복되지

않아야 했던 것은 이 영화는

우리가 이 고도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의

승리를 이야기하려고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원작이 그러했든지

아니면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새어나갔든지, 종래의 흥행 전략에

충실해보려고 만든 작품이지, 어쩌면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동기를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때문에 감동이 만들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엄청나게 깊은 잠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는데, 왜

이 영화를 볼 시간에 잠을 자두지

않은 것인지, 후회도 따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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