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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l 31. 2015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유능한 문화 판매자, 하루키에 대해서 말하다.

<2013년 작성하고 2015년 수정 퇴고>


한번 뒤돌아 보기로 했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들과 에세이,

잡문들과 더불어 얼마나 오랫동안

접하며 살아왔는지.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시점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오던 때였다.

1988년쯤에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친구가 내게

하루키라는 작가의 마력에

대해서 전달해주었다.


이른바 사반세기, 25년 가까이,

지금까지 나온 그의 출판된 책들은

거의 한 두권 빼고는

다 사서 보고 있는 독자이다.


그리고 나처럼 그의 글들에

중독된 영혼들은 지척에 깔려 있다.

하루키가 글을 써온 연대기 정도는

척척 아래처럼 찾아올 소스가

여기저기 깔려 있다.


하루키는 벌써 34년째

소설을 써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유명세도 전 세계적으로

시작보다 점점 확대되고 있다.


1Q84의 경우에는

그 출판 시점에 출시되었던

아이폰 신제품과 판매 속도면에서

비교가 되었을 정도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風の歌を聴け 1979

표지부터 똑같은 책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기도 한다.


1973년의 핀볼 1973年の ピンボール 1980


양을 쫓는 모험 羊をめぐる冒険 1982


중국행 슬로 보트 中国行きの スロウ・ボート 1983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1983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는 글과 조화를 이룬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世界の終りと ハードボイルド・ワンダーランド 1985


빵가게 재습격 パン屋再襲撃 1986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 の森 1987

출판 시 국내 실정에 맞는 "상실의 시대"로 제목 변경

댄스 댄스 댄스 ダンス・ダンス・ダンス 1988

TV피플 TV ピープル 1990

먼 북소리 遠い太鼓 1990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国境の南、太陽の西 1992


태엽 감는 새 연대기 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 1995

밤의 원숭이 1995

렉싱턴의 유령 レキシントン の幽霊 1997

스푸트니크의 연인 スプートニク の恋人 1999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神の子どもたちはみな踊る 2000

해변의 카프카 海辺の カフカ 2002


어둠의 저편 アフターダーク 2004

도쿄 기담집 東京奇譚集 2006

1Q84 1Q84 2009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  2013


하루키의 소설이 가장 정점을 찍고

전 세계적으로 많이 팔려나갔을 때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로 국내 출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할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서적 판매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인세도 증가 중이다.



국내의 판매량은 상세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연령별로도 상세 분석된 내용을 구글링으로 간단히 찾을 수 있다.

분명히 최근에는 더 많은

그의 책들이 팔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중국의 젊은 독자들이

하루키의 책을 2000년도 초반부터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중국 지역에서 팔리는 수량은

 어쩌면 전 세계 하루키 서적 판매량의

상당수를 이미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가 한국의 입장을 들어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아베 내각의 극우 성향 때문에

열 받을 동아시아 타 국가들의

분노에 대한 우려의 경고를,

일본 지식인들을 어느 정도

대표하는 선에 서라는 명분에

이야기할 용기가 났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아베 따위가~" 운운하는 비난을 남겼다. 나름 좋은 나라다. 고소 안당하는 것을 보면.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아베 내각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던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베 내각이 어리석다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의 작품 역시 중국 대륙에서

적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것이 아베에 대해서

쓴소리를 던지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임을 알지만,

큰 동력이 될 수 있다.


중국인들의 반발을 일본 정부가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안

하루키 같은 일본 작가들의

 중국 판매고가 저조해질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산업의 거대한 시장도

일본 앞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정권을 만나서

고생하는 것은 일본 기업들뿐만

아니라 문화 상품을 팔고 있는

창조자들도 포함된다.


일부 한국 언론의 기사들은

2-30년 전에 20-30대부터

그의 책들을 보아온 독자층이

현재 점점 더 노년에 접어들었고,

최근에 10~20대에 이르른 세대들이

보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점점 독자층이 줄어들 것이다라는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들이

재미있게 읽고 있다면,

향후 적어도 10여 년간은

줄어든다라는 표현은

유효하지 않다.

국내 판매량 분포도를 보자면 매년 전세대에 걸쳐서 고르게 읽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한국과 같은 정말 코딱지 만한

서적 시장에 비해서 중국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시장이며

학식이 있는 어마어마한 인구의

지식인들의 독서 열풍도

지금의 우리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의 글의 성공의 비밀은

여러 차례 사람들에 의해서

분석되고 있고 나 역시도

여러 번 말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하루키는 이제 탐구나 연구,

지식을 발굴하게 만들어주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회고의 대상이며

담배나 술 같은 기호품이다.


나의 평가는 이번 2013년 산

와인의 맛은 어떻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답답한 이야기를 오늘은

한번 적어보고 싶어 졌다.


우리나라에는 도대체

왜 이런 중독성을 가진 작가들이

잘 보이지 않고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국내를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억한 심정이

갑자기 이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에

도저버린 상처처럼 되어서다.


2013년 여름 이문열의 삼국지를

리디북스라는 인터넷 어플 회사에서

24,900원에 10권을  다운받아

볼 수 있게 해주었었다.

시간 지나니 더 싸졌다

다운받아 읽은 제 1권에 나온

이문열 씨가 13년 7월에 다시 적은

서문을 보았다.


그의 서문에서 느낀 것은

이른바 우리나라의 동시대를

관통하는 일류 작가 이문열 씨는

왜 이렇게도 좁은 세계에 천착했으며

그 세계관을 확장시키며

세계로 나가지 못하고

우파 중의 극우파에 해당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남았을까 라는

의구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들이었다.

작가보다는 정치가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런 답들을 가지고 나니

그 두 사람 간의 상대적인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블로그에 요령 부득의 글을 올리고

있는 블로거인 나에게는

해볼 만한 비교라고 생각한다.


한일 감정 싸움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1988년도 경에 각기 경력상

비슷한 연배(60대 작가)의 작가들이,

한일 양국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비슷하게 들었음에도, 현재

세계적으로나 각 국에서나

서로에 대한 평판이 그렇게나

 차이가 나게 된 것일까 라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먹고살기 위해 재즈카페도 열었고,

1979년도에 29세에 이르러서야

처음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를 써서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을 하게 되었다.


또한 생계를 위해 각종 잡지에

기고하고 영문 소설들의 번역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소설 쓰기도

멈추지 않았으며

각각의 책들마다 글로벌적인 관심을

이끌고 적지 않은 판매고를

지금까지도 계속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설을 가르치기 위해

교수로 갈 정도의 공신력을 획득하고,

일본 헌법을 새로 쓰게 할 수 있는

문체를 가진 작가로 거론되는 동시에,

각종의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

서방 지식인 중의 대표 하나로서

언급하는 사람이 될 정도로

자신의 영향력의 범위를 점점 키워왔다.

독일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보다 위대해 보인다.

그가 번역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은

자신이 그 번역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배움의 장으로 보는 태도와

또 하나의 자신의 본직업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시선이다.


이렇게 번역을 대해온 작가이기

때문에 치밀하게 영미 소설 문학을

이해할 수가 있었고,

그에 의해서 쓰여진 글들을 통해

영어로 번역된 자신의 소설들을

범 인류적인 문학으로서도

인정을 받게 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일본과 동아시아에서 판매되는

만큼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그렇게 번역 작업들을 마다하지 않고

잡문일 수는 있지만 계속적인 기고와

에세이 집필, 독자들과의 다채로운

소통 노력을 기울여왔던 덕에,

그 자신 세상의 트렌드를 쫓아가지는

않았더라도(또는 못했더라도)

세상의 변화를 자신이 쓰는 책들 속에

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문열 씨가 이번 삼국지의

이북 땡처리를 하면서

새롭게 적어넣은 서평은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

("그동안 문학 권력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라는...'

내가 보기에 오명이 아니라 맞는 말)

로 점철되어 있었다.


삼국지를 번역하는 작업을

일종의 격이 떨어지는 부업으로

생각했었다는, 고전을 번역하게 된

입장에 처한 이로서의 경우에

맞지 않은 태도와,

이미 기 번역이 되어 있는

일본판 삼국지와 그 번역본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 나은 작품을

써 내야겠다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 이전의 그의 모습이었던

동시에 현재에도 크게 변화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자화자찬을

보고 있다면 정말로 부아가

치밀 정도가 되어버린다.


하나 볼 수 있는 장점은

그는 정말 솔직하고 자신의 탐욕

앞에  스스럼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교수는  부업이라기보다는

본업의 확장이고, 번역은 부업이다'

이 구분법은 참으로 이상하다.

사실 번역이라는 것,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데 말이다.


한국에서야 번역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대단치 않게 평가되어,

구글의 에릭 슈미트가

쓴 '새로운 디지털 시대'라는

작품이나 "스티브 잡스" 전기가

엉망으로 번역되어 보란 듯이 출판되는,

대충 번역과 최저임금 적용 번역의,

위태위태한 사회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초판은 비추천한다
출판사는 해명했지만 이 역시 초판본의 구매는 비추천한다

하지만 글을 업으로 하는 분께서

글을 정밀하게 다루어 번역하는 작업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부업"이라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것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잘 씌여지고,

잘 전달되는 글이라는 개념이나

번역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 자신의 실력의 향상 등의

작가와 독자와의 진정성의 교류는

분명히 아니었던 것 같다.  


대만에 가서 수집한 자료들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일부 문예가 필요한 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써넣었음을

젠척 밝히는 내용을 통해서,


글 그 자체를 성실히 번역하거나

좋은 소설을 써서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야심에 사로잡히고

수직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자리에 가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골몰하는 사람임도

또한 보여주었다.


난 그가 가진 야심과 권력욕

두 가지가 그가 가진 문학적 재능을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일류의 작가에서 일류의 정치꾼으로

변화시킨 그 자신으로서는 잘된

특질 두 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루키도 잘난 체를 하는 작가이고

그의 위상은 세계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곳에는 물론 일본과 한국의

국격 차이나 인프라 차이,

영미나 중국 등의 외부 국가들로부터의

국적에 대한 반응 차이라는

그 두 사람의 역량을 뛰어넘는

다른 요소들도 개입된다.


하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문열 씨의 소설보다 하루키의 소설에

더 매료되어 있고 이 현상이

이른바 소설을 읽기 좋아하는

대다수의 나의 세대 근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향이라면,


정말 한국의 그 세대에게 어필한

일류 작가라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분이

"이문열"씨라면 각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문열 씨의 작품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서 나름 프랑스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기사를

접했던 아주 오래전 기억이 난다.


이른바 애국심으로 그 기사에

나름 어깨가 으쓱해졌었고

심지어는 이문열 씨가 나를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꼭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던 적도 있었다.

그분의 강연을 들었던 적도 있었고.


그런데 그 강연의 내용조차

"문학의 권력 이동"이라는

제목이었다.


더 이상 작가가 권력자로

불릴 수 없는 시대에 왔다는

자조를 깔고 있었는데,

이미 그 강연을 할 때, 그 이전부터

그의 목표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1988년도 경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팔릴 때

이문열 씨의 번역 작품인

"삼국지"는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


2013년 이문열 씨의 삼국지 10권은

총 99,000원의 원래 가격에서

29,900원으로 e북으로 할인되어

한국에서만 팔리고 있었으며,

하루키의 신작은 한국에서 권당

10,000원이 넘어가는

제 값을 받고 팔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 내 출판사인 민음사에서 지급한

16억 원 이상의 인세는 하루키의

주머니 속에 고히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외의 수많은

국가에서도 제 값을 받고도

그 이상으로  존중받는 서적으로

팔리고 있으리라.


그러나 왜 이문열 씨의 작품은

그의 모국에서 출판물의 가격

파괴를 급격히 이루고 있는

땡처리 작품이 되어야 했을까?


난 우리나라가 외국보다 강대국이

되거나 더 부자 나라가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문화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는 나라가 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소니보다

훨씬 많은 전자제품을 수익성 높게

팔아왔지만 우리나라의 문화 상품은

엔터테인먼트 쪽에 한정되어 있다.


순간적인 인기보다 25년이 넘어가는

긴 여운을 깊이 전달할 수 있는

문화적 상품을 제값을 받고 해외에도

팔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신드롬이나 광풍으로

사라져가는 존재가 아닌

길고도 깊게 남아있는

문화적 현상이며 전 세계 인류문화의

적지 않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

일본의 위대한 문화 판매자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권력자는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권력과 교환해야겠지만 문화 판매자는

다른 가치들과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교환하며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국소적인 권력 자체보다

훨씬 큰 범위에 걸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거대한 보상을 구하는

진심으로 탐욕스러운 문화 판매자를

아직도 우리 나라의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중에서 보게 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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