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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ug 31. 2019

<기생충>-반지하와 대저택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삶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되돌아보기

스포일러가 기생충처럼 들어 있습니다.

유의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를 본 여러 관객 중에서

대비되고 있는 두 가정의 삶의 공간

"반지하"와 "대저택" 두 곳에 대한

좀 더 경험적으로 맞닿는 느낌을

받은 관객 중에 나와 유사한

인생의 궤적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회의 일부

소외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주거지인 반지하 방에서 초중고

생활을 해왔었다. 그 퀴퀴함과

더불은 눅눅한 삶의 풍경을 기억한다.

그곳에는 빛이 들어오긴 들어온다.

반으로 줄어든 조도와 더불어.

반지하 속의 가정은 피자 포장용 박스를 접으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 나름대로의 위계를 유지한다.

지금은 그럭저럭 조도 걱정은 없는

지상의 주거 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삶이 조금은 나은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데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고, 조금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고마움만으로는

모자란 삶을 살고 있다고 이 영화는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사실 반지하 방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그 방을 벗어난 주거 공간에

있는 사람 그 양쪽을 다 불편하게 만든다.


"봉준호 감독"은 정치적 입장을

단 두 가지, 우파와 좌파로 밖에 분류하지

못하는 "흑백논리"로 무장한 사람에게는

무조건 "좌파"로 밖에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좌파"만의 편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현재의 한국 사회, 나아가서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난한 이"는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를

하고, 어느 한 진영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제기된 문제는 가난한 자의

공간에 모여사는 "반지하"의 퀴퀴한

냄새를 묻히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몇 가지 되지 않는 선택이

"대저택"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기생

하는" 이른바 "보잘것없는 부속물"같은

선택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문제다.

그들은 상류층 집안의 허드렛 일을 모두 맡은 가족이 되지만, 대저택에서 잠시 호사를 누리려할 때 파국과 만나 그 어느때보다도 자신의 삶의 공간이 비참해지는 순간과 마주친다.

그 선택이 마치 올바른 계획이자 방향인 듯

보이는 것이, 이를 추구하는 자나 이를

추구하게끔 만드는 자가 아무 관심 없이

방치하고 있는 "이 사회의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구조 때문이다"가 들려온

감독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희생당하고 마냥

착취당하는 계층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속임수와 사기를 써서 "기생충"처럼

"상류층"의 삶에 들어붙어 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애쓰며, 바둥거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끼리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서로

싸우기까지 하는 난국을 보여주는

골칫덩어리 족속 같은 모습으로까지

묘사한다.


그러다 마지막의 파국에 와서 "송강호"의

단호한 "이선균"에 대한 칼질로 오히려

이 사회에서 "기생충"과도 같이 이들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인간에

대한 모멸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란

인식이 전혀 없으며,


단지 "반지하방"이란 주거 환경이 상징하는

"가난한 이"의 징표를 달고 있는 사람을

자신과 이분화하고 이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조차 무의식적으로

하지 못하며 경원시하는 부유층에 대한

가난한 이의 모멸감을 뚜렷이 드러낸다.


일순간 그 집에서 정말로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있던 전직 가정부의 남편에게

칼질을 당한 자신의 "딸"에 대한 복수보다

그는 일순 자각한 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복수한다. 그리고, 그 저택의

지하실로 숨어들어 그 가정부의 남편처럼

대 저택 안의 "기생충" 생활을 하며,

은둔하여 살아간다.


"송강호"의 아들 배역인 "최우식"이

이 사회의 구조 상에서 결국에는 가능하지

않을 '큰돈을 벌어' 이 저택을 사서 이전의

지하실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를 다시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몽상처럼 꾸고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묻고 있다.


"가난한 이"는 삶 속에서 몽상으로써의

꿈만을 꾸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범죄에

가까운 사기를 쳐야 하는 현실에 처한다.

이분화된 사회 속의 상류층이 이들에게

"반지하의 냄새"같은 낙인을 찍어

자신과 의식/무의식적으로 이분화하는

사회가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충"이

되는 상태로 계속 남아야만 하는가?이다.


전작인 "괴물"에서 "봉준호 감독"은

가난한 가족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정부와 권력 기관의

무능함을 넘어선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괴물"을 물리치는 다소

희망적인 상황을 사회문제의

너머로 보여주었고,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권력이

풀어내지 못하는 취약한 치안 상황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지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현실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던졌으며,


"마더"에서는 부모조차도 없는

취약 층이 살인의 누명조차도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구조상의 문제를 갖고 있음을

드러냈고,


"설국열차"에서는 빙하기 속

유일한 생존자를 태우고 달리고

있는 열차 속에서 우화처럼 그려진

현 사회가 다다른 막다른 길의 위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제3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생충"은 블랙코미디를 통해서

관객을 이야기의 중심부까지

"가난한 이"의 비참을 "반지하방"이

물에 잠겨버리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보여주고, 이 취약 계층을 이 비참한

공간과 몽상으로 밖에 남길 수 없는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놓아둔다면, 그 자체로 사회의 위험을

크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며,


이 사회의 "상류층" 은 그저 이 상태를

방치하기보다는 자신이 보다 안전해

지기 위해서라도 "가난한 이"의

현실을 이해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적어도 인식해야 하는 게 아닐까? 란

질문을 던졌다고 느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러나 그중에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던 당신은 옳다.

그러나 이 영화 제목 “기생충”은

단, 한 곳에만 “기생충”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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