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인정받을만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가? 그래야만 하는가?
글을 오랜 시간 쓰고는 있는데, 과연 제가 쓴 글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계속 쓸 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이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심지어 피드백도 가뭄에 콩 나듯 받는 이런 글을 쓰기 위해 계속 시간과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까? 이런 질문이 비 오듯 쏟아지는 그런 날을 만났습니다. 네, 오늘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저만의 질문일까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쓴다면 그런 질문의 어떤 경로상에 있는 사람에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마도 지금 이맘때쯤 다시 글쓰기를 그대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새롭게 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만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래와 같은 글이 맥락도 없이 줄줄이 써지네요.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누군가에게도 저와 비슷한 질문이 있었다면 같이 생각해보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질문은 제가 쓰는 이런 잡문들도 문학이라 불릴 수 있을까?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밥 딜런"이 수상한 그 순간부터 이 세계의 문학에 대한 불분명한 정의나 구분은 일거에 바뀐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상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은 아니고, 이제는 그저 그 권위를 통렬히 공박당하는 입장이 되긴 했습니다만 문학의 범주를 공식적으로 넓힌 예이긴 합니다.
"월터 페이터의 산문" 은 "Walter Pater's Essay"이기도 한데요. 산문이나 에세이나 수필이나 그 경계의 구분이 모호한 동의어 중에 어떤 단어에 내 글이 속하는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듭니다.
산문 형식의 소설도 가능하고 소설 형식의 산문이 가능했던 인류의 문학사를 돌아보고, 이제 노래 가사도 "시"를 갖다 쓰거나 그 자체로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조금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원래부터 문학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하네요, 제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이중섭 씨가 담배 종이에 그린 황소 그림들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렸다면 낙서였겠지만, 그조차도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고 인정받아 왔듯이, 어쩌면 "낙서"조차 예술에 포함된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잡문으로 범벅이 된 이 공간도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기를 원한다면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론 겸손하게 또는 명철한 의미로 자신이 쓰는 글이 “읽을거리다”라고 이야기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그의 글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오랜 "문학사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아이러니를 갖고 있습니다. 그 작가는 “장정일”이었고, 한 분 더 하자면 “하루키”였습니다.
그분들이 열심히 글을 썼던 젊은 시절부터 문학 종사자분들은 지금보다 더 심하게 이 두 사람을 각각의 속한 나라에서 순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비평 아닌 비난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와서 둘의 글은 무게감도 생기고 진지한 문학으로 인식하는 것이 더 당연해 보일 정도가 되었고 젊은 층에겐 두드러기 나는 중압감을 주는 존재감도 갖게 되었지요.
그런고로, 내가 내 글에 어떤 정의와 범주를 부여하는가 이것이 타인이 평가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 되네요.
저는 긴 문장을 쓰는 것이 잘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말도 길고 글도 길고 요약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사고를 종종 하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는데, 특히나 보고서나 이메일, 프레젠테이션 등의 자료를 만들 때, 디지털 문명으로 세상이 뒤덮여 조금이라도 긴 글을 쓰고 나면 찬 바람만 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타인의 조언이 주어지지 않거나 엄청난 에너지를 기울여 커피를 짜내 듯 쓰지 않는 한 종종 벌어지는 저에겐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런 단점을 줄이고, 단 한 사람이라도 맘 편히 빨리 읽고 갈 수 있도록, 스마트폰의 화면의 짧은 너비에 맞도록 글을 끊어 쓰는 것이 저의 긴 글에 대해 느끼는 난해함을 중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끊어 쓰는 것에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 "밀란 쿤데라"의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원제: Testaments Betrayed)"에서 사람들이 오랜 시간 오해하고 있던 "카프카"가 쓴 글에 대해서 명쾌하게 통찰력과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쓴 내용이 끼친 영향도 있습니다.
"카프카"는 꽤 오랫동안 난해한 글을 쓰고 그 난해함이 심미적이고 종교적이고 엄청난 고도의 사유에 의해서 쓰인 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해석과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문학사적으로 위대한 작가란 평가를 받은 것은 맞는데, 본질이나 글의 진정한 의도를 벗어난 독자를 본의 아니게 양산했던 것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크게 인정받지 못했고, 사후에 그의 친구 노릇을 하던 사람이 그의 미발간 되었거나 미완성된 글까지 모두 발표하면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자신의 더욱더 난해한 해석"을 덧붙여 그 오해를 더 깊게 만들었음을 명쾌하게 "밀란 쿤데라"가 밝혔는데요. 그전까지 저도 오해가 정확한 이해라고 10여 년가량 믿고 있다가 이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카프카”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적지 않은 진면목은 가려버린 거였죠. (참조: http://m.yes24.com/goods/detail/6830864 )
"심판"이나 "변신"이란 작품에 대해서 깨알같이 단어가 가득 들어찬 문고판들만을 읽으며, 그 난해함에 어떤 한없이 깊은 사유가 있는 것이라 오해했었던 30여 년 전의 문학 소년 시절의 어리석음을 사회생활을 시작한 20여 년 전에야 그 한 권의 책을 읽고 통렬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카프카"가 글 중에 일부는 쓴 의도부터가 출판을 하게 될 경우 글자 크기를 최대한 크게 하여, 장 수를 늘려서 단락별로 시적인 미학이 드러나는 책을 만들기를 원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여러 발견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출판된 거의 모든 카프카의 책은 깨알같이 작은 글씨체로 쓰여 있고 단락을 잘 나눠야 이해할 수 있었던 그 부분의 미학은 증발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학사 속의 오해를 진실로 알고 해석에 적용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난해함을 피해서 가급적이면 자신의 글을 유머와 자극적인 표현까지 덧붙여 이해하기 쉽게 독자에게 읽게끔 하려고 노력하는 배려심 있는 작가였지만, 그런 동기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그런 동기에 맞춰서 큰 폰트로 장수를 늘린 "카프카"의 소설의 일부분은 출판사의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오지 못했던 듯 합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전자 출판된 그의 책이라도 그 부분에 한정하여 폰트를 최대화해서 읽어 보겠다고 결심만 한 상황이지요. 20여 년째 그 결심은 실행되지 못해서 아직 오해는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닙니다. 오해했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죠.
"카프카"같이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오해와 더불어 있는 작가의 집필 방식의 일부가 그러했다면, 폰트가 큰 글씨로 여러 단락을 나눠서 글을 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적지 않은 저의 블로그 등의 글에 장문을 짧게 짧게 줄로 나누어서 글을 쓰는 방식을 채택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른바 가독성을 좋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이 제 의도대로 잘 읽히고 있을까에는 항상 의문이 남습니다. 위에 이어서 이 역시 괴로운 일이죠.
그렇지만 제 글을 포함해서, 문학으로서의 가치던 그저 읽을거리로서의 가치던 저와 다른 분들이 공들여 쓰고 있는 각각의 작법과 동기, 주제, 소재를 사용한 글들에는 다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가치와 의미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향을 잡고 쓰고 있다면 어느 순간에는 어쩌면 이미 그 방향으로 갔을 때 만날 수 있는 종착지의 윤곽이라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은 허무함에 빠지지 않고 이 공허하게 맴도는 세상 속의 자신을 바로 세우고, “자신의 삶이 자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같은 곳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곳일 수도 있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순간순간만큼은 우린 유사한 꿈을 가진 글 쓰는 이들이라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