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Apr 18. 2021

<일인칭 단수>-잘 지는 법

어떻게 일상적인 패배를 잘 다스리고 살아가는가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고 난 이후에

오랫동안 하루키의 신간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엔 종종 검색해서 신간을 찾곤 했지만

팍팍한 삶 속에서 잊고 지내다 불현듯

찾아보니 슬그머니 “일인칭 단수”가

작년 11월에 출판되었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삶의 여유로움이나 이른바 문화적 향유라는

말 그대로 먹고사는 문제와는 큰 상관없는

취미이므로 팬심이나 중독 아닌 이상

꼭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갈망이나 경이감 같은 것을 지니고

그의 글을 기다리진 않는다. 때로는 그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 것을 성숙의 징표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뭐, 경색된 한일

관계의 영향도 의식하고 싶진 않지만

알게 모르게 있었으리라.


연관된 기사를 읽다 보니, 우리나라의 여류작가가

대기업에 잠시 다니다 나와서 쓴 판타지 소설이

베스트셀러 1등이 되어 “일인칭 단수”가 잠깐

올라섰던 자리를 금세 차지한 기사가 여러 개

나왔다.


“기사단장 죽이기”같은 장편도 일단 출시하면

수개월간 1위를 점유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이제 그도 시대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고, 독자의 관심도 그의 한 때는

가볍고 불가사의하며 재기 넘치는 이야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물론 문학성의 측면에서라면

어쩌면 그의 깊이와 너비는 계속 더

확장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이 정도 생각을 하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같은 문장을

수십 번 썼던 나는 마치 내가 대중 속의

1인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책을 사서

어느 순간에 지하철을 오가며 읽고 있었다.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거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독자가

당연히 무더기로 쏟아지게 글을 썼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므로

저항하거나 화를 낼 필요도 원망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변함없이 책을 펼친 이후부터

닫기 전까지 그냥 끌려가게끔 만드는

글쓰기가 순식간에 모든 단편을 다

읽게 만들어 버렸다.


읽은 뒤에 되새겨 보니, 책의 제목인

"일인칭 단수"가 왜 나왔고, 그 외의

단편이 이 제목에 묶였을까가 조금씩

윤곽이 잡히며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인칭 단수"란 단어에 이 단편집의

핵심이 있다기보다는 그의 장편소설이

점차적으로 "삼인칭"으로 변화했다가

다시금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일인칭"으로 돌아왔는데, 결국

그의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인칭" 그것도 당연히 "단수"였을 때

훨씬 더 잘 전달되었다는 깨달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100%까진 남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곳에 본질적인 인간 존재의 한계가

있고, 그 안에 외로움과 고독, 슬픔,

자신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함이 들어 있다.


그의 장편 소설은 이 본질적인

"외로움"과 더불은 한계, 그것도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한편에서

점점 왜소화하며 사라지는 "나"의

모습을 그렇게 단순히 사라지지는

않도록 자신의 취향과 삶의 이유를

합리화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가꾸며

나름의 일상 속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그려진 "개인"의 모습은

통상 그렇게 왜소화 되는 절차를

밟고, 서류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옴짝달싹 못하게 국가의 시스템이나

그 아래에서도 사이비나 연예계,

문화적인 조직의 아래의 계층 구조에

깔린 별 볼 일 없는 존재로서

규정되어 버리기 일수다.


자기 자신은 그런 굴레에 얽혀 들어

나약한 존재라고 하는 일방적인

분류에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 더 강력한 존재 또는 상방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되고 그렇게 취급당한다.


마치 "테러리스트"가 닫힌 구조의 사고로

뭉쳐진 집단의 계율에 의해서 그 집단에

해를 끼칠 마음도 없고, 그 집단의

역사도 알지 못하고, 선의로서 대하고

도움을 줄 생각조차 했었을만한 개인이

있다는 생각 일절 없이, 폭탄 테러를

가해서 떼로 죽여버리듯이,


"군국주의"에 빠진 "일본 군인"이 한국이던

중국이던 일단 "신민"이 아니란 이유로

뭉텅이로 죽였고, 아직도 "일본"이 아닌

아시아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하급 국가로

믿고 싶어 하듯이,


"트럼프"같은 극우파 미국 대통령

코로나에 연결하여 아시아인 차별을

합리화하고 그렇게 널리 퍼뜨린 유색인종

증오가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현재에도,

비겁하게 "아시아 여성과 노인"에 대한

"흑인(트럼프가 하대한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과 "백인"의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듯이,


자신이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을"의 입장에 처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파국을 택하게 되기도

하듯이,


매력을 갖고 있는 이성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지만

결국 그 이성의 초대에 맞춰 찾아간

리사이틀 장소는 휑한 공터였고,

말 그대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바람 맞고, 넋이 나가듯이,


자신은 아니지만, 좋아하던 여자의

오빠가 가진 장애 때문에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가지 못했듯이,


못생겼지만 나름의 기품을 가진 여자가

세상을 음악인 “사육제”로 받아들인 듯이

사기 행각을 벌이며 자신의 외모와

기품 간의 간극을 메우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야구팀이 정말로

오랜 기간 동안 우승은 하지 못하고,

매 경기 주로 지는 것을 신물나게 보고,

아픈 마음은 그대로 하고 흐릿한 희망을

갖고 다음 경기를 계속 기다리듯이,


자신의 소설 속 스타일리시한 주인공처럼

"부룩스 브라더스"의 슈트를 잘 다려 입고,

분위기 있는 바에서 좋은 술을 한 잔 마시며

쿨함을 느끼려고 해도, 이 고상한 척하는

그를 혼내며, 그가 언제 저질렀는지도

알 수 없는 일로 맹비난을 하는 여자를

갑자기 만나게 되듯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원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굴레를 짊어지고

누군가로부터 예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할 폭력을 겪고 나서 때때로 복수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때로 그런 폭력은 그렇게 가해자가

가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고 원하던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막을 수 없게끔 벌어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한마디로 신나게 매일매일

이기고 있기보다는 적지 않은 경우,

우린 더 많이 지고 있다. 물론, 법이나

규정, 힘의 구조상 쉽게 자신의 행동을

제어받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올라갔거나

시작부터 그런 위치에서 인생이 시작된

아주 희소한 사람을 제외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조차도 "이기는 일"의 수보다는

"지는 일"의 수가 더 많다.


"하루키"는 이른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함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이 책 속에서 "자신"의

"일인칭 단수"의 시점에서 "장편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일면 화려하게 세상과 싸워

요령 좋게 이기고 존재감을 납득시키는

"쿨함"을 드러내는 것이 어려운 현실 속의

리얼한 자신과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이 단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편소설" 속에서는 그 같은

현실을 벗어나 뚜렷한 승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설 속의 가해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그 가해자로부터

요령 좋게 벗어나거나 쿨하게 패배를

씻어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일인칭 단수"의

핵심 메시지라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비교적 자신에 호의적이었던

이 한국 출판 시장에서 1위를 예전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만 누린 그의

"상대적인 패배"를 그가 어떻게 잘 견딜지가

그려진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그 어떤 유명 작가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글로벌 출판 시장에서 길게 명성과

판매고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이길 수 있는 글을 쓰기보다는

 

"패배를 견딜 수 있는 글" 또는 "잘 지는

글"을 쓰고, 그 결과가 승리가 되든

패배가 되든 상관없이 잘 견뎌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결국에는 승자가 된

그 수많은 히어로와 영웅, 유명인들의

삶의 뒤에는 이긴 횟수를 훨씬 능가하는

패배의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위에 이야기한 "트럼프"조차 "오바마"의

이름을 가지고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과 유사한 이름이므로 그의 출신 성분을

음해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다가 일종의

회동에서 "오바마"로부터 신랄하게

'"리얼리티 쇼의 흥행꾼"밖에 안 되는

녀석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라는 직설적인 비난을, 앉은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중에

찍소리도 못하고 당했던 적이 있었다.


"오바마"의 정확한 출신 성분이 "이슬람

테러리스트"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밝히면서 말이다. "트럼프"는 그 치욕스러운

패배를 나름 잘 극복하고 일어서서

"대통령"이 되었었다. 아니 오히려 그같은

수모가 그에겐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 의해 정치적인 코로나 대응과

인종 분열, 배타주의로 많이 망가진 "미국인"은

그에게 재선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정권을 불의한 방법으로

폭도들을 조종해서 지키려 했던 것은

아주 대표적인 잘못 지는 방법이었다.


이 엎치락 뒤치락의 과정에서 결국 다시

승리하는 입장에 처하는 자는, 잘 지고

그 진 이후에 현명한 회복과 승리를

위한 발걸음을 제대로 걸어간 자들이다.


승리만으로 100% 이뤄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보다 현명한 전략은 잘 지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처럼 직설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답 인양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잘 읽히는 글로 남겨 놓는다면,

각각의 독자의 세계에서 마치 "중심이 여러 개인

원을 그려가는 것처럼" 자신만의 "원"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굉장한 곡해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키"가 "일인칭 단수"를 통해 적어도

내게 던진 퍼즐을 맞춰가는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일부 유명한 국내외 작가는 "하루키"가

"답"을 말하지 않아 온 "작가"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사실 "답"을 "소설가"에게 묻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다.


위대한 "소설가"는 "답"을 적어서 남기지

않는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가 원래 "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소설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그 "질문"을 이해하면서 독자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만드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통한 해답은 수없이 많은 방향에서

찾아내도록 만드는 진정한 "지혜"와

더불은 "다양성"을 포용한 "장르"다.


물론, "소설"로 답을 적는 "작가"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소설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사족: 이 책 속에서 “하루키”는 수필인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에

앞 서 말한 “잘 지는 것의 중요성”을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이 다른 단편 소설에 연결되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략의 귀재>-생활화된 전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