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다른 것을 향해서 글을 쓰는 것도 유효한 창작이다
다음 칼럼과 다음 블로그, 카카오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이런저런 공모전에 도전한 지 어언 22년가량이 흘러갔다. 거의 대부분 수상과는 관련이 없었고, 단 한번 브런치 무비 패스에서 선정이 되어서 관련된 글을 적었던 적이 있었다.
선정이 안된다고 해서 아주 큰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 이곳은 내겐 일상의 에너지를 다시 만드는 공간이고, 아주 오래되어 가는 취미를 위한 공간이지 이것을 생업으로 어떻게 해보기 위해 정말 진지하게 모든 것을 기울여 내가 속해 있는 현실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무리를 해서 참여하고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무리를 하려고 해도, 이미 나 같은 중년에게 있는 에너지의 수준이란 한계가 있다.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무리할 무모함은 없다.
물론, 참여하고 있는 분 중에는 이른바 진검 승부를 하고 있듯이 매우 진지하게 창작을 하고, 공모전에 임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높고도 큰 에너지와 역량을 투여하고 동기 부여를 하는 분이 정말로 많이 있으며, 수상을 해야 하는 어떤 자격이 정말로 미리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면, 그같이 진지함을 기반으로 참여하고 있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편 한 편의 글을 공모전을 향해 올릴 때, 혹시 선정될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라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하고 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도전을 하고 있을 때, 나름의 문장을 써온 역사가 있는 사람 중에 하나로서 나름의 기대를 하고,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거란 꿈을 꾼다.
설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글의 수준도 높아지고, 좀 더 나은 반응을 이른바 전문가라는 분을 통해서 제대로 받을 수 있겠지 그런 기대 하나 없이 쓰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도전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활력과 에너지, 집중력, 그리고 말 그대로의 창조력이다.
일상 속에서 지금 하고 있는 취미가 없는 공간에서는 생겨 나기 힘든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에너지" 그 자체가 내겐 중요하다. 소설이나 에세이, 영화 감상문 모두 치열하게 내가 참여하고 있는 삶의 무대와는 다른 곳에 있다.
그곳에서 창작을 함으로써 일상의 공간이 확장되고 경험하는 인생이 다채로와지며 인식의 무대가 넓어진다.
삶의 의미가 보다 무게를 지니게 되고, 직업의 공간에서 겪고 있는 스트레스의 경감 효과가 벌어진다. 어차피 그런 저런 의미에서 쓰지 않을 수 없는 글을 때로 공모전에도 올리는 것이 현재 내가 처한 현실이다. 그 이상 힘을 기울일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 자체로 가득한 일상을 지탱하기도 벅찬 가운데, 글을 쓰면서 생기는 그 에너지로 다시 먹고 살 힘을 비축하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치열한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 이제 다시 정리하겠다. 이곳은 취미를 위한 공간이다. 제2의 직업을 만들고자 하는 승부에 참여하고 있는 공간은 아니다. 공모전에 참여하는 것은 이른바 삶의 활력을 높이고자 하는 내가 택한 자구책이다.
공모전에서 붙을 만한 글을 쓰는 법에 대해서 쓴 글을 읽다 보니, 시간이나 노력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결국에는 공모전에 글을 써서 내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는 글귀도 보았는데, 공모전에 당선되는 것을 목표로 처음부터 글을 써왔던 것이 아닌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평가를 내린 기준에 대한 이런저런 심사위원의 평가를 보다 보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간 평생 공모전의 어느 귀퉁이에도 오르내릴 수는 없겠구나라는 깜깜한 평면적인 어둠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기준을 미리 말해주었다면, 최대한 그 기준 범위에 맞는 글을 마치 "업무를 하듯이 치밀하게 구상하고 맞춰서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글쓰기를 하려면 왜 글을 써야만 하는 것일까? 나아가서 창작을 해야 하는 것일까? 란 생각이 들게 된다. "한국적인 현실이 반영된 글쓰기", 나아가 한국적 역사와 사회상, 현실과 연계된 글쓰기라고 하는데, 그런 글을 쓰면서 창작 능력이 확장되면서 보다 보편적인 공감을 가질 수 있는 글이 쓰일 수 있을까란 의문이 번져 버렸다.
국력에 비해서 글로벌 문학 무대에서 오랫동안 한국의 문학은 아직 제대로 된 인지도와 평가를 다채로운 기회를 통해서 획득하지 못했다.
한 강 님의 소설인 "채식주의자"가 맨 부커 상을 탔던 것은 한국적 현실에 대한 한글을 통해 나온 치밀한 현실 반영 그 자체보다는 그동안 잘 되지 않았던 "영문"번역을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해준 영미 네이티브의 번역에 의한 제2의 창작에 의한 것이 더 비중이 높았었다.
그 번역 자체가 적지 않은 비중의 오역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글로벌 전체에 어느 정도의 보편적인 공감을 갖는 영미 문학계가 인정하는 작품으로 "채식주의자"는 다시 태어났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학적인 갈라파고스화 현상이 좀처럼 글로벌화한 세계와 제대로 동조하지 못하는 현상을 "웹툰"이나 "드라마"만큼도 벗어나지 못한 한국 문학계가 "블로그"와 "온라인" 글쓰기라는 보다 세계적인 무대를 향해 열려 있는 시스템을 통해서 벌이는 공모전에서도, 심지어 그 글의 소재가 "안데르센"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현실, 역사가 반영된 것이 수상작"의 기준이어야 했다니, 잠시 그 글을 보고 있는 눈을 의심했다.
기운이 빠지고 급속도로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을 억누르고 어떻든 창작의 기운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펀치를 한대 머리에 맞고도 브런치에 이번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 2차 저작 창작 글쓰기 공모전에 대한 글을 한편 작성해서 남긴다.
SF 소설을 썼던, "안데르센"이 쓴 동화의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진 공감각적인 보편성을 다시 이어가기 위해 글을 썼을 적지 않은 작가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입장에서 쓰자면 이렇다.
1. 무국적적인 글을 쓰는 것이 이른바 시공적으로 한 국가에 속한 작가에게는 어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쓰던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느 국가에서 태어난 다른 국적의 사람이던 한글로 되어 있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고서 2차 저작물을 작성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었든지 한국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2. BTS가 해외에서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서 빌보드의 상위를 계속 점유하고 유명세를 높여간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인 기획사가 만든 내용을 기반으로 한국 가수들이 불러서,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조하는 문화 상품을 만들어 낸 것으로써 인정받는다.
그것을 한국적인 것과 별개로 평가할 수 있을까? BTS는 문학과는 다른 게 아니냐고 묻겠지만, 이미 노벨 문학상은 저명한 대중 팝 가수인 "밥 딜런"에게도 한차례 수상되었던 적이 있다. BTS가 이와는 100% 상관없으리란 주장은 개연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3.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글로벌 문학 시장에서 저명해진 작가도 일본의 문단 내에서는 "무국적 작가"라는 폄하를 당하며, 그 같은 비난을 겪던 중에 자신이 직접 영문으로 자신의 책을 번역해서 미국 등의 국가의 출판사를 만나 번역 출판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침으로써 전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하여, 일본 문학의 세계화에 이바지했다.
해외에서 "그의 글은 일본 내에서처럼 '무국적적'이란 평가를 더 이상 받지 않으며, 그의 글을 근본도 없는 글처럼 평가하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일본색을 색다르게 제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현재 평가받고 있다.
당시와 현재의 일본 내에서의 "하루키"에 대한 일본 문단 내의 비난과 평가와는 다른 평가가 해외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4. "안데르센"이 덴마크에서 쓰고 한국어 등으로 번역된 그 동화를 읽고 한국의 브런치 등의 온라인 작가들이 쓴 글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것이 "보다 한국적인 것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이었다면 예상이 되었을 2차 저작 창작이 왜 덴마크의 작가에게도 해당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쓰기 전에 이런 내용이 공모전 평가 내용으로 나와 있었던가? 봤던 기억이 없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 공모전에 도전은 이미 하지 않았을 것 같다.
5. 이런 자의적인 기준은 실제로 갖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내놓고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는 기준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이번 공모전이 이런 식이었다면, 아마 다음번엔 그 어느 나라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유사한 공모전을 벌려도, 창작할 범위가 엄청난 폭으로 줄어든다. 이미 쓴 사람이 느꼈을만한 낭패감은 일단 버려두고라도.
상을 받지 못한 것 자체는 그럭저럭 이해할만한 기준이지만, 창작할 에너지와 방향성을 협소한 범위로 몰아넣고, 갈라파고스의 세계를 그대로 더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주요 심사위원인 글쓰기 공모전이 2021년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내 공모전의 성격이라면, 참 암울하다.
도대체 몇십 년 더 갈라파고스 섬에 우리 문학이 갇혀 있어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솔직히 현존하는 대부분의 남녀노소 독자가 그런 것을 원할 리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창작이란 결국 이 세계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 창작에는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한국의 역사나 사회, 현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의 비중이 높아야만 했다면 왜 해외 작가의 저작권이 만료된 동화를 가지고 소설이나 동화를 쓰도록 오해하게끔 했을까?
처음부터 한국과 관련된 시사적인 르포나 논픽션에 가까운 글을 쓰라고 하고 쓸데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나 딴 나라 이야기 등등 상상력 발휘하는 부분은 최대한 글에서 빼 달라고 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그러나 현실을 벗어난 세계를 그려가고자 방향을 잡는 글 쓰는 이가 국내 공모전 같은 무대에는 맞지 않은 이들로 진작에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창작의 본연의 모습을 왜곡하고 제어하고 있으며, 동시에 창작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가능성의 상당 부분을 궤멸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1981년도의 국민학교 1학년 생이 백일장 참여했던 것과 특별히 다를 게 없는 협소한 기준이 2021년도의 48살의 중년의 글을 쓰는 이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다름 아닌 나의 글쓰기의 에너지가 돼야 하는 듯하다.
40년간 이 골방에 갇혀 있는 날로 규모와 영향력이 줄어드는 “한국 전통 문학”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세계와 아직도 고집스럽게 담을 쌓아놓고 이민족을 경계하면서 순혈주의를 추구하는 폐쇄국가처럼 굳건히 변화에 저항하면서 버티고 있음을 때때로 확인해주고 있다.
죽어가는 사양산업이 가는 길을 고수하면서 Last Man Standing을 추구하는 집단 내 소수만이 안전하게 버티는 사회가 되어가는 형상이다.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창작을 통해서나마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창작자의 본질 중에 하나이다 보니 이른바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참, 미(우면서도) 좋다". 고정관념 덕분에 그것을 벗어난 작품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른바 우리나라의 창작하는 이들이 단지 공모전에 뽑힐만한 글만을 쓸 생각을 하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이 나라의 문학엔 현재도 없었을 것이고 미래야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