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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14. 2015

<하루키 잡문집>-내가 아는 그

내가 생각하던 하루키와 그 자신이 말하는 하루키는 닮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 비채 | 2011-11-2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 소개: 당신이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것 30년 하루키...


일본 소설류의 적자라기
보다는 미국 소설류의 적자


오래전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꽤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하루키에 대한 몇 가지 이해점들과

실제 그 자신이 말하는 자기 자신과

자기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큰 모순 없이 비슷하게 마주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하루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아, 이렇게 구구절절이 이야기

해주지 않아도 이제는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저는 그럭저럭

팬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잘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1. 그는 자기 자신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같은

위대한 작가의 소설 같은 것은

이미 쓸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정 짓고 있다.


다만 열심히 성실하게

한우물 잘 파는 야구 선수가

늦은 나이에 이르러서도

빛을 발할 수 있었듯이

소설에 기울인 하루키 자신의

인간적인 성실함은

결국에는  보답받을 수 있었기에

소설가로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고

여러 번 얘기한다.


2. 자기의 글들은 스승도 없이

스스로 배우고, 음악과 더불어

혼합하고, 번역하고 읽고,

실존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배워온 소중한 자산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3. 그는 여러 부분에서 일본 소설류의

적자라기 보다는 미국 소설류의 적자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본류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써왔다.


4. 그리고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선사할 수 있는 지혜와 질문들을

여러 각도에서 잘 기술하고 있다.


5. 과연 소설의 효용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름 용의주도하게 답변하고 있다.


6. 그는 과연 시스템이라는 벽 앞에

서 있는 개인들을 이야기해왔던 것이 맞다.


불확실한 부분들을 가진
불가사의한 작가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루키는 물론 그의 글 속에서의

 인물들로 추측해 보았을 때는,


다소 미스테리어스하고 비현실적이라

실상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확실한 부분들을 가진 불가사의한

작가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한 그의 소설들 속의 이해 불가한

다층적인 성격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들은 온전하게 잘 쓰여진

소설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독자들의 관심을 책의 끝까지

붙잡게 이끌어 주고

각각의 독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환상을 잘 덧붙일 수 있는

여지를 또한 충분히 선사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그 불가사의함에

매료되었음에도 하루키를

불가사의한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놀라웠던 점은,

내가 10여 년 전쯤에 썼던

소설 "도에 대해서 아세요"에서 나온


모 종교 집단의 모습에 대한

( 씌여진 시점으로부터도

10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다룬 )

자전적인 논픽션에서 그의 소설책들

몇 권이 언급되었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상실의 시대, 댄스 댄스 댄스......),


실제로 그 상황에서 읽었던

그 책들을 통해서

그 종교 집단이 주는 환영을

벗어날 수 있는 사고의 힘을 얻었음을

20여 년이나 지나서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40대가 된 지금에도
읽을 필요가 있다


허구/허상과 실제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허상을 차단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허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소설 읽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우리를 둘러싼

허상과 현실의 경계를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계속 파악해나갈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이 40대가 된

지금에도 소설은 읽을 필요가 있다.  


하루키의 잡문집에서

그가 자랑스러워한

스토리 중에 하나는

그의 책을 읽은 독자 하나가

일본 내의 사이비 종교 단체에

속해 있다가,


그 단체가 금기시하는 소설 읽기로

허상과 실제를 구별하여

결국에는 그 단체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물론 그 독자와 동일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제 잘 알 수 있다.


사이비 종교 단체는

신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제시하는

허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허상도

접촉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과 격리된 공간에서

그 종교 단체가 제시하는 허상을

현실이라 믿게끔 하는 작업들을

반복하며 수많은 신자들을 포섭한다.


그 신자들은 바보들이 아니라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파악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일 수 있다.


이를 좀 더 확장된 비유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하루키의 책만을 보는 이상은

그에 대한 팬덤으로 뭉친

그의 신도의 하나가 될 뿐이다.


따라서 그를 비판해야 하는 부분은

비판하고, 즐거운 부분은 즐기면서

또 다른 작가들이 쓴 좋은 소설들이 주는

풍요로운 지혜의 보고인 또 다른

허상들로도 이동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현실 간의

상대적인 간극을

잘 파악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준

가장 큰 메시지였다.


나는 하루키를 통해서 소설을

이해하고 밀란 쿤데라를 통해서

소설 너머 미학을 조금 알았다.


그리고 아직 더 많이 알아야 할

내용들이 가지 못한 영역에

잔뜩 널려 있다. 다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조금 더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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