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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ug 15. 2022

<헤어질 결심>-진실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

파이란과 만추, 헤어질 결심의 사랑 판타지 3부작 감상문

"헤어질 결심"외에도 "만추"와 "파이란"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헤어질 결심(2022)"은 보고 난 이후에 절로 그전에 봤던 결이 같은 듯이 느껴지는 "만추(2011)"와 "파이란(200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은 10여 년씩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졌다. 마치, 이런 종류의 사랑 스토리가 잊혀질 만할 때 한 번씩은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호흡을 가진 것처럼.

좌: 파이란 (출처: 조선일보), 우: 만추 (출처: 중앙일보)

더구나 "만추"에서도 "탕웨이"가 나왔었기 때문에, 짧고도 비극적이며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그린 이 두 작품은 왠지 어떤 시간적인 연결고리를 가진 채로 "탕웨이"라는 배우가 "남편"이 줄지어서 죽음을 당하는 존재로 "팜므파탈" 비슷한 배역을 맡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물론, 만추에서의 남편의 죽음은 억울한 누명이긴 하다. 다만, 이 두작품에서의 결말은 공통적으로 반쯤 열린 결말이다).


"파이란"은 나머지 두 작품과는 달리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두 남녀의 사랑이라고만은 말할 수는 없는 애틋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 그 이미지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지만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눈길처럼 순백의 매력과 가냘픔을 지녔던 "장백지"의 모습이 나왔던 작품이었다.



이 세작품에 공통점이 몇 가지 있어서 아래와 같이 쓰지 않을 수가 없다.


1. "한국인"과 "중국인"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건너뛰어서 서로 간의 다른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짧은 시간 교류했음에도 아니 교류조차도 아닌 짧은 교차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마음속의 울림으로 퍼져 드는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2. 현실적으로는 한한령과 중국에 대한 거부감으로 멀어지고 있는 두 국가의 관객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치와 경제적인 이익이 개입되지 않은 연애 같은 것도 이뤄질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친밀한 거리와 의식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3. 멜로물 본연의 입장에서 결국에는 "신파"로 흘러야 하고 두 남녀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굴곡진 연애의 순간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슬픔이나 막막함 같은 감정을 느끼게끔 만들어야만 하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절제되고 억제된, 벌어진 상황에 비해서는 모자라다 싶은 "슬픔"을 드러낸다.


4. 아직 "사랑"이란 감정을 내부적으로 느끼고 실제 하는 것으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다운 관객"에게 길게 여운이 가는 메시지를 남긴다. 물론, 세 가지의 사랑 다,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이고 "해서는 안 될 사랑"처럼 그려지고 있다. 현실에서야 대부분은 이 세 작품의 사랑의 그 어느 쪽 주연도 되고 싶지 않으리라.


5. "에로틱한 요소"는 은연중에 그려져도 직설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 3개에는 그저 말 그대로의 "플라토닉 러브"라 불리는 정신적인 사랑과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오가는 두 남녀의 연심만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지루하게 여길 새가 없게끔 계속 관객의 시선을 끌고 간다.


그럼에도 이 세 영화는 다른 영화다. 그 차이점은 너무 명확하고, 감독부터가 모두 다르다(파이란: 송해성, 만추:김태형[탕웨이의 현재 남편], 헤.결.:박찬욱). 차이점을 적는 순간부터 각각의 작품에 대한 노골적인 "스포일러"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에 더 적지 않으려 했으나, 적어도 "헤어진 결심"이 갖고 있는 차이점만큼은 적어야 이 글을 시작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헤어질 결심"에 대한 감상은 아래와 같다. 짧게 이야기하자면 "한순간에 일어나는 위험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이 디지털 시대의 기재를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느껴지게끔 잘 그려냈다."이다.


1. "애플"이 이 영화의 공식 협찬을 했다는 내용을 조금만 더 손품을 팔아서 뒤져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에서 떠오른 것은 한국계 미국 배우 "존 조"가 출연했던 "서치(Searching)"에서 영화 속의 스크린에서 큰 비중으로 출연한 맥북과 아이폰, 구글, SNS 등을 모두 사용해서 행방불명된 딸을 찾아가는 장면이었다.

출처: Movie Review Mom

"애플 워치"의 "시리" 기능을 사용해서 녹음을 하고, "아이폰"의  "시리"로 노래를 찾고, "에어팟"으로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내부 앱을 찾아보면서 범죄에 대한 확증을 얻기도 하며, 문자를 주고받는 등의 다양한 기능을 능숙하게 "박해일"이 맡은 "해준"이 활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간병받는 "할머니"와 기타 인물들도 아이폰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출처: 위키트리 뉴스마켓

2. 이런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결국 "영화"가 되었던 "뮤지컬", "연극"이 되었든 간에 이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거나 앞서 나가서 담지 못한다면 그만큼 "시의성"이란 것을 놓치면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이 강박적인 감각과 의식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여러 감독들은 이런 시대 변화에 쫓아가지 못했을 경우에 벌어질만한 "시의성"을 놓치고 만들어진 영화의 흥행 저조 등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SF영화"를 만들거나 "미래 시대"를 모델로 하거나 "디스토피아"를 만들어서 현존하는 문명보다 훨씬 더 후진 시대로 돌려버리는 것 등이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이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대중의 시선과 같은 높이를 가능하다면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이 영화 속에서 모바일 기재를 능숙하게 다루는 인물을 과도하리만치 보여주면서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 때문에 인물 각각이 갖고 있는 현실성이 더 강화되었다.


3. 상기에 비교했던 2가지 영화와 비교해서 "헤어질 결심"이 뚜렷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같은 범죄 심리 스릴러물에서 나온 것과도 같은 긴장감을 영화 전반에 뿌려서 대부분의 관객이 이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담고 있는 영화를 끝까지 쫓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면 "팜므파탈"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파멸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 가공할만한 미모와 매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진심은 자신을 사랑하게 된 남자를 이용하는 선에서 넘어가 있는 것으로 그려지며, 그런 그의 행동과 말이 이해될 수 있도록 "박해일"의 "해준"도 매력적인 중년으로 그려진다.


10여 년 전의 "만추"에서의 "탕웨이"보다 이 영화 속의 "탕웨이"가 비록 어눌한 한국말과 능숙한 중국어 사이를 오가는 대사를 하고 있기는 하나 보다 더 깊이를 지니고 있고, 복잡한 심리와 더불어 그저 하드웨어로 갖고 있는 외모에서 오는 매력을 훨씬 더 넘어서는 배우로서의 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 절절이 들었으며, 마지막에 그가 선택하는 일종의 파국도 전혀 작위적이지 않았고, 그 캐릭터 자체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과 느낌으로 가득히 찰 수 있게끔 했다. 진일보한 연기력과 더 상승한 매력이 같이 하고 있었다.


"한산"에서 본 "박해일"이 얼마나 자신을 억압에 가깝게 절제하며 연기를 했고, 대사보다 더한 눈빛 내공으로 연기를 했다는 사실을 "헤어질 결심"을 보면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 이곳에선 눈빛으로 하는 연기를 최소화하고 대사에 더 많은 힘을 실었고, 육체적인 노고를 더 확대했는데, 점점 더 나이를 먹을수록 관리가 잘 되는 탓인 것인지 신체 비율도 더 좋게 변화하고 외모로서도 더 중후하고 기품이 있는 면을 많이 노출하면서 이 중년에 이른 사랑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도록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 배우가 현대 사회에서 멀어진 철 지난 "사랑 타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에는 이 두 사람이 가진 뛰어난 연기력도 중요했지만 여러 설정 상 이 시대 바깥으로 사라지지 않은 느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반복되는 "모바일 기기"의 활용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둘이 더 젊고 활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라는 얼핏 "불륜을 미화하는 듯한" 대사가 하나 나온다.


이 대사는 마치 직설적으로 "탕웨이"가 연기한 "서래"가 "해준"에게 구애하는 듯한 대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치정 관계에 의한 살인범을 쫓고 있는 "해준"에게 이 미결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범인"의 거취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다.


오래 전의 한국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면 아마도 영화는 개봉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교양 중심 주의로 무장한 몇몇 평론가와 정관계 인사, 유명인이 신랄하게 비판을 했을 것이고. 그러나 이젠 그런 비난이 이 같은 영화를 향해 쇄도하지 않는다. 시대가 몇 바퀴 이상 빠른 속도로 전환해 왔으니까.


사람 사는 곳이라면 벌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을만한 일이 벌어진다는 정도의 대사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서래"와 "해준"의 관계를 보자면 결과적으로 "서래"가 "해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고, "해준" 역시 "서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를 종용하는 대사다.


이 대사가 나오고 나서도 영화가 이른바 품위를 잃지 않고 "에로 불륜 물"로서의 지저분한 분위기로 흐르지 않는 것은 영화 속의 치밀한 설정의 역할도 중요했다.


"해준"의 아내인 "정안(이정현이 딱 적당한 수준에서 연기해냈다)"이 부부관계에 대한 각종 통계를 쏟아내며, "섹스"만이 부부관계를 증명하는 길인 양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이 부부간의 관계에서 실종된 "사랑"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서래" 만난  죽게   남편 중에 "기도수" 아내를 소유물로 밖에 보지 않는 이었고, "임호신" 또한 자신의 사기 행각을 위해 부려먹을 도구 정도로만 다루는 이였기 때문에 "해준" "서래"  사람이 서로를 만나면서 얻게 되는 "살아 있는 느낌"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둘만의 관계가 무엇일지 충분히 상상하고 납득할  있다.




시대가 많이 바뀌다 보니 오픈된 결말을 남겨 둔 뒤에도 그것에 대한 위험성 있는 오해를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감독을 만나기도 하는 것 같다.


몇몇 인터뷰를 뒤져보니 영화의 스토리의 상세한 해설과 결말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수준으로 공개한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스포일러는 충분 이상으로 그 인터뷰 안에 들어 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이 대사가 이 영화를 압축하는 내용이라고 묻는 한 기사의 기자의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가타부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긍정으로 읽혔다.


"해준"은 자신이 사랑한다는 말을 전혀 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서래"에게 되묻는다. 그러다 나중에야 자신이 "서래"가 저지른 범죄를 눈감아주기 위해 "해준"이 자기 자신 "붕괴되는 것"조차도 무릅쓰면서 증거를 인멸하도록 만든 행위와 말을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것"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대사가 오가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언어라는 것이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오랜 깨달음이 영화 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봉사”라는 키워드다. “해준”이 일관되게 호구처럼 행동하는 이유기도 하고.


극 중 "임호신"같은 이는 그저 습관처럼 "사랑해"라고 내뱉지만 "해준"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걸며 희생을 무릅쓰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인정하길 어려워한다. 그러다 그것을 "사랑"으로 알아들은 사람을 상당히 기적적으로 만난 것이다. 같은 종족이란 표현으로.


"만추"는 그런 스토리를 보다 젊은 나이에 미국이란 낯선 타국에서 만난 두 남녀를 통해서 그려냈고, "파이란"은 자신의 의도치 않은 호의를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계속 글이나마 표현했다가 죽은 한 여인에 대한 사회적으로 추락한 한 남자의 뭉클한 애도감을 사랑 같은 감정으로 그려냈다.


"헤어질 결심"이 내겐 삼부작과도 같은 이 세 개의 멜로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마치 꼭 이미 이 세상에 살아서 주변에서 말하며 행동하고 있는 듯한 착시가 생길 정도로 잘 형상화되었다는 데 있으며, 그 과정이 이 중에선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데 있다. 더 많은 피와 더 많은 비극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족: 매 10년마다 이런 영화가 나같은 올드한 관객에게 제공하는 기능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다.


아직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결과를 거의 즉시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 10년 뒤에 또 이 검사를 받을 생각을 한다. 생애 주기의 건강검진이라도 된 것처럼.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내 가족과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나라는 영화의 스토리와는 다른 매우 건전한 안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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