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을 갖지 않고, 영화 보기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 뒤 상상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느 시대든
그렇게 이단아 취급받던 이런 존재가
종종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영화 보기는 적지 않은 사람의 오래된 취미다. 내겐 취미라기보다는 애인이다. 애정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간에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무엇인가에 대한 결핍의 시기가 길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시기뿐만 아니라 최소한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어김없이 부족한 자릴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결핍의 시기에 종종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입하면서 그 시기를 돌파하려고 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 때로는 이것이 성공의 자질이 되어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높은 성취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 내게 주어진 결핍은 배움이나 일에 대한 중독이 되기도 했고,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해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차와 같고, 일하지 않고 쉬기만 하는 사람은 엔진이 멈춘 차와 같다'. 쉬는 것과 일하는 것 사이에 걸쳐 쉬는 동시에 일하는, 양쪽 사이를 오가는 대상과 함께 하며 조금씩이라도 사고를 움직이는 것이 더 좋았다. 그것이 이 취미였다.
영화 보기는 브레이크와 같은 기능을 했다. 잠시 시동을 꺼두는 듯이 일종의 명상 상태로 데려다줬다. 동시에 엔진 기능도 해냈다. 머릿속으로 보기 전과 보는 중, 본 후에 계속 해석과 감상이 이뤄졌던 것이다. 쭉 앞으로 주행하듯이 글쓰기란 도로 위에 올려주었다.
그 두 가지 기능이 계속 영화를 끊임없이 보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오랜 시간 영화를 보고 리뷰를 써봐도 "글쓰기" 자체는 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영화에 대한 이해도"는 더 올라가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만큼 이해의 폭을 더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배움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평론이라도 작성할 수준으로 공부하기 위해 돌아가기엔 너무 먼 곳에 와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좀 더 폭넓게 그동안 보지 않았던 작품을 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작품을 고른 뒤에 "아차, 잘못 골랐구나"란 실수를 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동안 보지 않았던 작품을 돌아보는 것이 이 애인을 새롭게 이해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결론이 나왔다.
지금까지 보았던 방식으로 영화를 보지 않고, 찔러서 보기로 했다. 그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이제 써보려고 한다. 마치 애인에게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며 눈웃음과 미소를 전달하듯이, 때론 뭔가를 하지 말라고 신호를 주기도 하듯이, 화를 내는 듯이 찌르기도 하며.
여러분이 이 글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게 된 이유는 그동안 다른 보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문가나 산업종사자는 기존에 축적해 온 지식적인 측면을 기반으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일상 속의 비전문가가 쓴 이런 에세이에 가까운 글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느 시대든 그렇게 이단아 취급받던 이런 존재가 종종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찔러보기의 3가지 방법은 애인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와도 어느 정도 닮았다. 그럼으로써 그 어떤 시기에도 충족감 비스무레 한 것을 주는 동반자를 하나 갖게 되는 것이다. 보고 있지 않아도 내 안에 있고 닿고 있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며 심지어 배신을 하더라도 관계가 깨어지지 않는.
1. 방법 1: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이제 회를 거듭하면 뒤에 이 방법에 대해 더 상세하게 쓰인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우선적으로 시도해야 할 것이 있다. 그전까지의 작품 고르는 방법을 벗어나서 한 번도 보지 않았을 작품을 최대한 그전까지 갖고 있던 보지 않을 수많은 이유를 잊은 채로 보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경지'라고 여러분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단지 '살아가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일을 끝낸 뒤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도 모자란 시간이 항상 아까워 죽겠는데,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시간과 돈까지 들여가면서 하냐'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작품을 보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미 어떤 수준 이상인 영상물을 감별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이란 것을 알아도 보지 않아 왔던 작품을 용기를 내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콩깍지만을 씌우고 보아 왔던 연인이 어느 순간 가면을 벗은 채로 만난다. 실망스러움도 약간 느끼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안도하고 더 잘 알아 가는 과정이 벌어진다. 영화에 대해서도 그걸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거다. 애인이 그저 내 생각대로의 그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하는 것과도 같다.
최근 1960-1970년대의 미국 영화와 우리나라 영화를 하나씩 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조금만 돌아보면 놓쳐왔던 그 시대의 명작을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엔 그걸 찾아가서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최신 영화도 넘치듯이 만들어지는데 굳이 그걸 볼 시간에 왜? 분명히 지금의 시대보다 느릿느릿하고 뻔한 트릭이나 원조격의 촬영 방식이 고지식하게 나오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그 영화를 보지 못하게 만든 선입견이다.
보자마자 시대의 고전이라고 불릴 만큼 잘 만들었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 있다. 그런 영화를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굉장히 많은 유튜버와 블로거가 지난 시절의 영화의 미덕과 독창성,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드러내주는 내용을 뿌리고 있다. 그걸 한두 개만 찾아봐도 무엇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나온다.
용기를 내서 "큐브릭 감독"의 1963년작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 내가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가?"를 봤다.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시니컬하고도 고증이 적절하게 결합된 그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대가 다른 감성이나 화면, 배우의 모습은 초반에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런 이질감이 사라진 중반부부터 이 작품은 커다란 매력을 선보였다.
"영화 찔러 보기"위한 제일 첫 단계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반면에 같은 감독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엔 실망했다. 초중반부의 스토리와 영상은 이 시대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 보이는 영상과 상상력, 꽤나 현실적인 디테일을 선사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서 초중반부에 뿌려놓은 떡밥을 전혀 회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지막 부분은 악몽처럼 느껴졌다. 선입견 없이 보다 만난 복병이었다. 그 낭패를 벗아나기 위해선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도 꼭 필요했다.
2. 방법 2 : "평론가의 해석을 맹종하지 않는다"
유명한 영화 평론가의 한줄평은 종종 유용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창작과 동시에 비평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같이 있어야 한다. 비평을 통해서 공격당하는 상황이 매우 괴로울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잘못된 점과 불만스러운 점을 이야기해 줘야만 고칠 것은 고치고,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만들어 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창작하는 진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평론가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잘 만들었든 못 만들었든 간에 그런 평가 전에 창조 작업에 참여하는 이가 모두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그 작품을 완성했는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주절주절 감 놔라 대추 놔라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거나 보이기 마련이라서다.
평론이 없어져서 영화 품질의 향상 기회가 줄어든다면, 창작자의 수고는 턱없이 부족한 찬사와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 깊이 있게 감상할 수도 있었을 관점이나 내용을 읽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감상을 가능케 해주는 창작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유용한 도구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론은 삶 속에서 자라고 배우고 느끼고 말하고 듣고 쓰는 등의 모든 방식의 사고와 행동 양식이 대다수 관객이나 시청자와 많이 다른 전문적인 이가 쓴 내용이다. 평론을 읽으면 더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지만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읽고 그 내용대로 볼지 말지를 결정하거나 그 관점에 영향을 크게 받은 채로 본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아니게끔 함정에 스스로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
남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본떠서 자신의 경험을 뒤로 한채, 어떤 형식의 사고방식에 자신의 생각을 끼워 맞추고 보는 것은, 이를 악물고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로 볼 수 있었더라도 일거에 그 들인 시간과 노력이 나의 것이 아닌 채로, 경험한 것을 잃어버리게끔 만들 수 있다. 그 평론가의 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대신 검증해 주는 수준의 감상에 다름 아니다. 뒤에 가서 다시 더 세세한 예제와 더불어 이야기할 것이다.
"영화 찔러 보기"의 두 번째 단계는 "평론가의 해석을 맹종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3. 방법 3 : "자신의 상상과 연결시킨다"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고 있다 보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만의 상상이 끝난 이후의 스토리로 이어지기도 하고 초중후반부의 여기엔가 "자신이었다면 그 내용은 좀 다른 것으로 바뀌어서 나왔을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아무리 압도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내 생각과 다른 구석이 잘 들여다보면 한두 군데 정도는 보인다. 그런 게 보이면 "이게 뭐야?"하고 더 이상 받아들이길 거부하게 되기도 한다. 통상 이런 경우 "내상을 입었다"란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것을 내상이 아닌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무공이 있다.
자신의 사고방식에 맞는 프레밈에 맞게끔 변형시켜서 이해하면서 그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자신의 나름 완결성 있는 다른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어 보는 것이다. 어떤 분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을 잘못 고른 작품 때문에 꼭 해야만 해?"라고 이야기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어려운 방법인 것만은 아니다.
"창조적인 오해"라고도 하고 "2차 저작"이라고도 한다. 표현만 수없이 다른, 같은 것을 다루는 문장이 있다. 핵심은 작품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파악한 뒤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보는 것이다. "동사서독"에 출연한 거의 모든 배우가 "동사서독"에서의 배역을 또한 유사하게 가진 채로 코미디인 "동성서취"를 만들며 진척이 느리고 깐깐하기 그지없는 “동사서독”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스트레스를 해소한 사건이 일종의 예제다.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작품에서 약간 변형된 수준의 또 다른 이야기를 꼭 남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만들다 보면, 어떤 작품을 만나든 최소한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비틀거리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확산적인 사고의 능력과 더불은 보다 풍부하고 견고한 내부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자신의 방식대로 그 해석이 틀렸든 맞았든 상관없이 이해해 보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속편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너무 좋아하는 작품의 속편을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은 팬심이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많은 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움을 달래는 동시에 자신의 창조력을 키우는 그 작업은 인공지능의 시대에 좀 더 직업인으로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동시에 더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덤이다.
보기만 한 것으론 충분한 경험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재창조"하면 그것은 보다 더 충실한 나의 경험이 된다. "자신의 상상과 연결하는 것"은 "영화 찔러 보기"의 순서적으로 세 번째에 오는 단계라기보다는 보고 있는 전체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더 많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유행에 뒤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급하게 많은 사람이 보는
영화를 찾아보지 않고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여유다.
"영화 찔러 보기"는 즐거움을 낳고 있다. 그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블록버스터"만을 찾아보거나 고상한 방식으로 교양을 쌓기 위해 "예술 영화"만을 찾아보는 것은 "영화 찔러 보기"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시청법이자 관람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가지 종류 뿐만 아니라 기타의 다른 종류의 영화와도 함께 하면서, 보다 즐겁고 더 유익한 방식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영화 찔러 보기"라고 생각한다. 지금과는 달리 보는 법을 실행하는 것이라서다. 더 깊고도 넓은 지식을 쌓아야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영퀴"를 하면서 서로의 지식을 뽐내기 위한 점수 내기의 자리에 많은 사람이 경합했던 수십년 전의 시기와는 다르게 이 세상에서 작품을 고르는 취향은 극단적으로 다양화되었다.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다 경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다. 소수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외에는 그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
더 많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유행에 뒤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조급하게 많은 사람이 보는 영화를 찾아 보지 않고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여유다. 그 다음에 자신의 삶에 유용한 것으로 그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영화 찔러 보기"다.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글은 챗지피티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삽화는 모두 빙챗으로 그렸더라도.
*유의 : "영화"를 그저 협의의 장르 하나로만 쓰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영화의 범주"에는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의 글에서 혼동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