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없이 의무를 지키려는 이가 "불의"가 되었던 시대를 그린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멈춰 있는 듯한 스토리가
개봉 영화 차원에선 반복되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가 "서울의 봄"이란 작품이 "1212"를 다루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연상되는 다른 작품이다. 이미 두 작품의 제목에는 가로를 열고 닫으며 (을 빼앗기다, 을 잃다, 이 불타다 등)의 표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 극의 끝과 그로 인한 현재를 보는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본디 귀족이란 전체 인구의 2% 미만이어야 제대로 사회가 돌아가면서 선택받거나 줄기장창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여받은 이들이 권력과 명예, 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가 된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도 특권 계층이 잘 누리면서도 비교적 안정된 국가라면 98% 까지만 평민인 국가일 것이다.
"대한제국"이나 "조선"이란 국호를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불리고 있다. 제대로 된 주권을 가진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위정자를 뽑아야 하는 국가다. 그렇지만 3명의 대통령이 독재를 꾀했다. 하나는 중간에 국민이 축출했고, 하나는 18년 간의 독재에 성공하다 암살당했다. 세번째는 반란을 통한 정권 탈취부터 시작했다.
두 번째의 독재자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는 종종 만들어졌다. "5 공화국"이란 드라마는 "전두환 대통령"역으로 너무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덕화 배우"가 열연을 해서 지지세력이 더 많아지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정권 탈취와 독재 등"을 시도해도 어찌 되었든 멋지면 지지하는 이가 많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의 10여 년간 "그때 그 사람들"이나 "남산의 부장들" 등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와 부패, 말기의 혼란상과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저격 내용과 직후의 상황을 다루는 장면이 나왔었다. 케이블 TV 등에서 이 두영화가 몇 번 재방되면서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멈춰 있는 듯한 스토리가 개봉 영화 차원에선 반복되고 있었다.
본 사람이 천만명을 돌파한
바로 그날 극장에 갔다.
"서울의 봄"이 나온 것은 그런 이유에선지 궁금함을 불러일으켰다. 2% 미만의 특권 계층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고 있는 3~40% 비중의 국민이 있고, "특권"을 멋지게 획득한 "신군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두 눈 뻔히 뜨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개봉 영화로 그들을 "반란군"으로 묘사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도 노골적으로 이 반란군과 싸우고자 하는 "수경사령관"으로 잘생기고 곧은 이미지를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는 "정우성 배우"가 "이태신 소장(실제: 장태완 소장)"역으로 나왔다. 의외의 캐스팅으로 "전두광 소장"을 "황정민 배우"가 맡았고 둘 간의 팽팽한 라이벌 대결이 이 극화의 중심축인 작품이 개봉되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도덕, 규정 준수, 법준수, 애국, 애족 등등 온갖 인간 사회가 이 동네에서 쌓아온 가치를 그저 우스운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 시대, 이곳에서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신기한 일로 여겨졌다. 첨에 이 작품의 흥행은 흔들렸다. 본 사람이 천만명을 돌파하는 그날 극장에 있었다.
권력과 돈, 명예가 있으면
무엇하나 안 지키고 망가뜨려도
"정의"라고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실제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는가? 고증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들어진 것이었는가?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좌지우지하는 규정과 법 등을 철저히 무시하고 최소한의 법적 요건만 갖춘 채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까지도 2% 미만의 귀족인양 떠받들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시대에 맞게 다시 체감하게 만든 것이 중요했다.
멋지게 거짓말을 하고, 북한이 쳐들어오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들이 일으킨 내란에 전방 부대까지 동원한 세력은 영화의 끝에 한 장의 사진을 멋들어지게 남긴 뒤에 이 이후의 행적을 돌아보면 대부분 군대와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면서 계속 "천수"를 누리다가 사라져 갔거나 아직 그 명맥을 대를 이어 유지하고 있다.
같은 민족을 핍박하고 쉽게 쉽게 죽였던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는 나라에서, 또한 내란을 일으키고 같은 국민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티 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었던 반란군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던 북한이 쳐들어오건 상관없이 전방의 정규군까지도 서울에 끌어들였다. 이들이 "반공"과 "빨갱이 척결"을 얘기해왔다.
"계엄군사령관"을 납치한 세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기도 했고 못했기도 했던 당시의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차장" 등등의 육군본부 내의 여러 장성의 한심함은 매우 뛰어난 "발암연기"여서 절로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 났을 정도다.
이들이 절묘하게 결탁하고 잘 이합집산해서 만든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이는 그래서인지 절차가 잘못되었던 불법이던 안전사고던 사람이 죽은 인재가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저 "힘 있는 것이 정의"라고, 아니, 권력과 돈, 명예가 있으면 무엇하나 안 지키고 망가뜨려도 "정의"라고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98% 이상의 우리가 이걸
그대로 놔둬야만 할까?
이 작품이 던진 질문이다
중복으로 여러 차례 본 관객을 좀 빼고 대략 전 국민의 20% 좀 안 되는 이가 이 작품을 봤다고 하자. 솔직히 본 관객 모두가 무엇을 생각하고 갔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보는 내내 내가 있던 관에서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이 "발암"의 드라마를 고통스럽게 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최후반부의 "이태신 소장"과 "전두광 소장"이 마주하여 메가폰을 잡고 서로 대결하는 씬은 너무 극적이어서 이것이 대체 역사물로 반전을 이뤄주면 어떨까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야포 부대"가 "반란군" 등이 있는 곳에 포를 쏘았다면, 아마 조금은 더 정상적이고 적법한 세력이 이곳의 역사를 세워갔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보수"가 정말로 나라를 위하는 세력으로써 보다 더 진중했을 것이다. 최근에 "친일 작가"가 쓴 '강제 위안부 동원은 허구'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일까지는 최소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부끄러움을 잃고 "정의"를 따지지 않는 곳이 되어 가고 있는 명확한 징조다.
지금 현실에 있는 것은 "불의"를 그대로 보고도 방치하면서 남아버린 "패배감"이다. 그저 "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듣고 보는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그저 살아 있는 것만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지금의 모습인 것 같다. 98% 이상의 우리가 이걸 그대로 놔둬야만 할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