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Mar 03. 2024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4-3

LOSER17의 첫 번째 시나리오

4-3 LOSER17의 첫 번째 시나리오

"이게 우리 아빠 회사의 최신 시뮬레이션 게임 시나리오 제작 툴이야"

"커피색 머리"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금 전에 사랑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채로 누워 있는 "LOSER17"의 얼굴을 어루만진 뒤에 머리맡에 피라미드 형태의 최신 컴퓨터인 "PD"를 올려놓았다.


ProDuction과 ProDucing, ProDucer, PyramiD, Plasma Dynamics 등의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동시에 "프로메테우스"사의 개발 제품, Prometheus' Development를 의미했다. 이 컴퓨터는 무엇을 만들고자 하던 더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도록 했다. 생산성 극대화 그 자체였다.


지난 세계의 영화라는 장르는 급속도로 쇠퇴했다. 기본적인 메인스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현실과 거의 구별이 안 되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원작이 만들어지면, 게임의 소비자가 알아서 그 게임의 스토리와 일부 디테일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변형시켜서 즐겼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 개발의 원본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라고 하는 것은 구시대의 "영화"라고 불릴 수 있었다. 그 구시대의 영화감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과 수많은 스태프, 연출가, 고증, 주조연, 엑스트라 등을 어떻게 활용해서 "영상"을 제작할 것인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상당 부분에서 "AI"가 도움을 주었다. "플롯 생성기"라든가, "배우 캐스팅 보드", "역사 고증 대행", "스토리 초고 생성 및 교정", "흥행성 높은 패턴 재현 및 형성" 등의 에디터 툴이 전문가의 능력을 더 뛰어난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어설픈 전문가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하기도 했다.


영화를 갓 배운 창작에 대한 재능 있는 십 대가 6개월만 몰입해서 여러 번 시도해서 익숙해지면 2000년대의 거장 영화감독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수준에 필적하는 영화도 여러 편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안에 네가 만들고 싶은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를 그냥 막 만들어 봐"


"왜 갑자기 이런 일을 시키는 거지, 마님?"


"아빠한테 네 얘길 해봤어"


"가난한 시뮬레이션 게임 폐인으로?"

잠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몇 번 마주치면 인사를 좀 나눈 정도였을 뿐, 아주 먼 거리감이 느껴졌던 그의 인상을 떠올려봤다. 누추한 옷차림의 "LOSER17"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보곤 했다.


"내가 봤을 땐, 네가 '시뮬레이션 게임 창작자'로 소질이 좀 있어 보인다고 했어"


"'브레이킹 셸'의 게이머로서는 내가 괜찮을지 몰라도, 그건 그렇게 관련 없는 듯한데"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넌 지금 의무교육인 고등학교까지는 어떻든 한국에서 다닐 수도 있겠지만,


네 주정뱅이 아버진 대학교 학비부터는 대줄 능력이 되지 않을 거야. 넌 어떻게든 밥벌이를 빨리 찾아야 돼. 언제까지 그 꼰대 원망만 하면서 인생을 망가뜨릴 작정이야?"


"마님, 게임 시나리오 쓰는 게 니 아버지와 어떻게 연결되어서 나에게 돈으로 오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말이야. 설명 좀 해줄래?"


둘 간에 무엇이 오갔든 간에 "커피색 머리"는 시켜야 할 일을 찾아 "LOSER17"에게 던지는데 능숙했다. 단 한치라도 상하관계 변화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생적이고도 훈련된 자세가 있었다.


"이 기계, 하드웨어는 물론 으리으리한 국가 정상급 오너인 "프레마치온"의 "프로메테우스"사가 만든 최신 제품이지만,


이 안의 '시뮬레이션 게임 시나리오 에디터'는 우리 아빠가 만든 "무인 공장"에서 인공 지능이 만들어낸 툴이야"


그가 머리맡에 놓인 "PD"의 꼭지 부분을 쳐다보자 한 면에 눈 같은 구멍이 열리면서 천장과 벽면을 향해 홀로그램 영상을 띄워 올렸다. 그에겐 아무 말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텍스트와 음성, 연결된 의식으로 편집 가능하도록 잘 배열된 종합적인 에디터 프로그램이 영상과 각종 비주얼, 음향, 소품, 배경, 장르 설정 등의 기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방 전체에 360도로 빽빽이 떠올랐다.

"굉장한데? 뭐라...... 할 말이 안 떠올라!"


"당분간 게임을 쉬고, 이걸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그걸 아빠에게 보여주고 최근 개발된 아빠 회사의 무인공장에서 만든 프로그램의 품질의 예제로 사용하게 되면, 네가 그 대가를 받는 거야."


"쉽게 말하자면 내가 베타테스터가 되는 거구만"


"근데, 네가 만든 작품을 아무런 가감 없이 아빠에게만 보여주진 않을 거야. 일단, 교정과 추가 편집은 내가 좀 더 손을 대서 주고, 그다음엔 창작자의 커뮤니티에 올려서 평가도 받을 거야"


"그렇게까지....... 너무 고마운데, 마님"


"네 말마따나 종으로 부리더라도 당근은 좀 주면서 부려야 되는 거니까.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



"PD"를 집으로 가져온 "LOSER17"은 느려터지긴 했지만 서민층에게 무상으로 지원되는 네트워크에 이를 연결하고 자신의 단말기와 연결한 뒤에, 당시에는 이미 너무나도 구시대적인 방법인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시나리오를 텍스트로 써나가면서 필요한 기능을 마우스로 클릭해서 썼다.

"브레이킹 셸"에서 자신이 창조한 게임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시점마다 완성되었던 고유의 캐릭터가 모두 창작의 재료가 되었다.


물론, 가장 깊은 상처인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폭력, 가난으로의 추락은 마치 한풀이를 하듯이 그가 쉼 없이 창작을 하도록 만드는 에너지가 되었다.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창작하는 방식을 익히고, 한 편에 2시간 분량인 시뮬레이션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데 작가 기준으로 통상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개월이었지만, 1주일 만에 끝났다.


"너...... 이번엔 내가 할 말이 없도록 만드는구나"

"PD"에 입력 및 저장된 상태로 1주일 만에 학교에서 시나리오를 받은 "커피색 머리"는 놀랍다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이것이 쉽지 않은 경지라는 것은 솔직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만들었어.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별로 재미는 없을 거야. 잘 다듬어줘"


"네가 재미있다고 하든지 말든지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우리 아빠 같은 꼰대가 되던, 누가 되든 간에 '고객'이 이게 괜찮고 재미있다고 여기면 그만인 거야"


그러고 나서 그는 2시간 분량의 영화화된 시나리오를 3배속으로 돌리면서 빠르게 시청했다. 중간중간 "LOSER17"이 보는 이의 반응을 의도했던 몇 개 지점에서 반응이 일어났음을 확인했다.



"그 반응이 일어났던 지점이 뭐였던 거지? 정확히 몇 개의 지점이었는지는 떠올릴 수 있나?"

"마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궁금함에 휩싸여 위험하게도 수시로 "LOSER17"에게 질문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되찾으려 노력했다.

 

"정확히 몇 군데였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5개 이상의 지점이었어. 2개는 웃음이었고, 2개는 슬픔, 1개가 해소감"


"저기 그렇게 해서는 도대체 뭐가 뭔지를 잘 알 수 없겠으니까 말이야. 그냥 한번 쭈욱 기억나는 대로 그 첫 번째 시나리오의 내용을 보여줘"


"부끄러운 작품이라 애써 잊으려 노력했던 건데, 그걸 왜?"


"그곳에 둘이 헤어지지 않았어야만 했을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야. 귀찮으면 말고"


"그렇지. 그걸 생각 못했군. 알았다고 하더라도 뭐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 내고 그 애가 반응했던 내용을 찾아보면, 과연 뭐가 중요했던 건지 더 잘 알 수 있겠지. 해보자고"


이전 11화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4-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