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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25. 2024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4-2

헤어진 이후

(출처: Dall.E3로 그림)

 

4-2 헤어진 이후


두 남녀가 하얀색의 스키복을 입고 가파른 경사를 무서운 속도로 내려온다.


스키 고글 안쪽에서는 경사도를 각도로 보여주는 정보 등 수치가 보인다. 안에서 보고 있는 스키장의 경사면을 지치는 스키와 스키폴, 신체의 각 관절의 기계 장치는 사용자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의식적으로 그저 잘 타고 싶다는 의지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스키를 탈 수 있고,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면 미끄러지는 속도와 각도, 폼까지 의식만으로 조절할 수 있다.


적당한 속도를 내고 곡면을 찾아 그 위로 날아오르며 점프를 하는 것도 설정만 잘하면 되는 기술이다. 더 난이도를 높여서 더 복잡한 기술을 더 민첩하게 해내는 비결은 정해져 있다.


인간의 신체가 본디 지닌 균형감 등의 능력의 비중이 아직 중요하긴 했다. 스키복과 장비 등의 성능이 그다음이다. 비중이 점점 커지는 부분은 신체에 이식된 칩의 성능과 장비의 싱크로율이었다.


스키장의 최정상으로부터 끝까지 내려온 두 남녀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커플처럼 보였다. 스피디한 활강을 마치고 드리프트 수준의 회전을 하면서 평지에 와서 멈춘 두 남녀는 고글을 벗었다.


 "커피색 머리"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였고, 그 옆에 약간 어색한 표정의 "LOSER 17"의 얼굴이 나타났다. "커피색 머리"는 "LOSER 17"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스키장의 풍경과 더불어 "LOSER 17"의 모습이 "커피색 머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시뮬레이션 영상이 사라진 뒤에 불이 꺼진 방으로 돌아오면서 남아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오래전 사춘기 시절 자신의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 보물 찾기라도 하듯이 더듬어 찾으며 "LOSER 17"과 여러 번 사랑을 나눴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픔과 슬픔도 떠올랐고, 아련함도 다가왔다.


‘그 녀석이 집안이 어려워서 마음고생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면 우수에 잠겨 있는 듯한 그 독특한 인상은 나오지 않았을 거야’


하루하루 슬프고 외로우면서도 그걸 억누르려고 애썼던 “LOSER 17”이 갑자기 떠올랐다. 마치 비오기 전의 물기를 감추고 있는 회색 구름이기라도 한 것처럼 종종 눈물을 머금고 있던 그였다.


‘난 지금, 그앨 그리워하는 걸까? 아님 잊어가고 있는 중일까?’



오래전에 "LOSER 17"과 헤어진 "커피색 머리"는 그 이후 수많은 남자와 사귀었다.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부족함을 느끼는 삶은 아니었다.


"LOSER 17"보다 더 외모가 훌륭하거나 머리가 좋거나 더 부자이거나 재능이 더 풍부하거나 감정이 풍부하거나 배려심이 뛰어나거나 상대적으로 나은 면이 더 많은 이를 만나면서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했다.


하지만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이 시뮬레이션 영상만큼은 신체 내부의 칩 속에 지워지지 않는 데이터로 남아 있다. 원래 이 데이터는 그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어야만 했다.


"LOSER 17"이 "커피색 머리"의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마스터"는 "커피색 머리"를 네트워크 상에서 찾아 연결하여 그의 의식 내부로 들어가서 "LOSER 17"과 연관된 정보를 키워드로 찾아냈다.


그리고 파악해 가는 과정에서 "커피색 머리의 아버지"도 주요 인물임을 알고 그의 의식 속으로도 파고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마스터"는 알았다. "커피색 머리"의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프레마치온"과 같이 만들어 내고자 했던 "거대 시뮬레이션 게임 제국", "일루미네이션 공원"의 스토리 설계자였음을.


(출처: Dall.E3로 그림)


그 "시뮬레이션 제국"을 보다 그럴듯한 사이버 공간이자 인간의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 제국에 걸맞은 "스토리"가 필요했다. 매일 연결 의식을 행하며 산책하는 공원이 되어야했다.


그 "스토리"를 만들어 내기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여야 할지를 "프레마치온"에게 물어본 바, 그가 준 답변이 "LOSER 17"이었다. 왜 그인지 묻자 "프레마치온"은 "AI인 제우스"가 찾았다고만 했다.


"브레이킹 셸"이란 게임에 접속해서 남긴 정보를 모두 포착해서 "프로메테우스"사가 개발한 당시 최고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제우스"가 분석해 낸 결과였다.


"커피색 머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에게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커피색 머리"에게 원했던 것은 "LOSER 17"과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커피색 머리"가 깊은 수면에 빠지기 전에 "신체 내부의 칩"을 통해 "LOSER 17"에게 빠져들도록 만드는 최면 영상과 음향 등을 무의식 차원에 닿을 수 있도록 몰래 반복 노출했다.  


뒤에 그가 특별한 "시뮬레이션 스토리 제작자"로 성장하기 전에 "입도선매" 형식으로 자신의 회사를 위해 가장 프레시한 상상이 가능한 창작자가 된다면 비용 대비 경제 효과가 극대화될 거였다.


어디까지나 절친한 친구이고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형편없이 가난한 "LOSER 17"의 집안과 사돈 관계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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