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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11. 2024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3-3

커피색 머리가 원했던 것(2)

(출처: Dall.E3로 그림)

3-3 커피색 머리가 원했던 것(2)

"그 게임의 뭐가 그렇게 끌리니?"

매일매일 학교에 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급식 외에 다른 음식을 양껏 사주는 "커피색 머리"와의 만찬 후에 "LOSER 17"은 거의 빠짐없이 바로 그의 집으로 출근이라도 하듯이 갔다.


일단, 집에 도착하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단 둘이 "브레이킹 셸" 게임을 같이 하거나 이야기를 할 동안 그의 어머니는 보통 집에 있었지만 가끔 간식을 방에 가져다주는 것 외엔 간섭하지 않았다.


언제 보든 시험 범위의 내용을 시험 시작 10분간에 속독을 하고 머리에서 연상만 해도 최소 8~90점대를 맞는 "커피색 머리"에겐 사교육이 필요 없었다. 읽은 내용을 통째로 복기하는 훈련이 되어있었다.


가난한 "LOSER 17"은 "브레이킹 셸"에서 상위 랭크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공부 외엔 사교육을 할 돈이 없었다. 용돈은 게임 사용료로 거의 남김없이 모두 들어갔다.


그래서 둘 다 사교육에 들이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 "커피색 머리"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LOSER 17"을 게임에서도 앞 서거나 그 수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개월간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캐릭터가 무조건 강하고 뛰어난 기술이나 전략, 전술이 있어야만 이기는 게 아니라서 맘에 들어. 갖고 있는 지식을 조합해서 주어진 환경하에서 가장 고유성 지수가 높은 존재가 되는 게 이기는 방법이거든.


해당 시간의 스테이지에서 고유의 존재로 남는다. 선과 악의 경계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양쪽으로 움직인다. '아프락사스'가 내 게임 속의 전략이자 전술이고 바로 핵심이야. 이 이상의 게임이 적어도 내겐 없어"


(출처: Dall.E3로 그림)


"하긴 넌 체육시간에 구기 종목에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고, 운동 신경 제로라는 걸 증명하고 있긴 하지. 그 외엔 어떤 게임에서도 거의 상대를 이겼던 적이 없고"


"마님, 아무리 내가 부리는 종이라고 해도 없는 칭찬이라도 해야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어?"   


"그게 이거라면 어떨까?"

"커피색 머리"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LOSER 17"이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안 톡 튀어나온 엉덩이 위에 얹혔다. 또래보다 도드라지게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오리 궁둥이"라 불렸다.


"저기. 이런 건 말이야. 칭찬이라고 하기엔......"


"착한 아이는 이럴 때 조용히 있는 거야"

처음엔 부드럽게 어루만졌지만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고고하고도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낮의 표정과는 다른 인상으로 변한 "커피색 머리"가 "LOSER 17"의 엉덩이를 꽉 움켜 쥐었다.



"터프한 스타일이군. 외유내강이라고 해야 되나? 그래 그게 사귀자는 신호를 처음 던진 거였던 거야? 좀 더 로맨틱한 방법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시 그런 가슴아린 기억도 있었는데 잊어버린 건 아니고?"


"마스터"는 싸구려 성인 동영상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두 남녀의 시작에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의도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최초의 연애실패의 기억을 "커피색 머리"의 무신경한 행동 정도로 왜곡한 것은 아닐지 탐색해보고자 했다.


"우린, 사실 훨씬 오래전 시대의 연애를 흉내 내고 있었어. '아프락사스'가 나왔던 소설이라면 고전인 '데미안'이 있었지. '싱클레어'라는 평범한 인물로 묘사되는 이가 화자인 성장 소설이기도 하고.


"싱클레어"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데미안'이 보다 앞 선 시대정신을 가진 존재로서 신비롭게 나오도록 한 작품이었지. 우린 시대의 변화를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겪으며 그 소설의 시대와 교감했던거야"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건가?"

"마스터"는 내용이 길어질 때마다 자동적으로 '짜증'과 '지루함'이란 신호가 발생되었다. 인간의 말로 하자면 '슬쩍 따분해진' 그는 가능하면 "LOSER 17"이 '연애 실패'에 관련되어서만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가 자신이 원하던 것과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이것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차단시키는 패턴을 가동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건가?'가 그 신호였다.


수많은 인간의 의식을 파고 들어가 이미 십 수 초 정도의 집중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진 그들의 정보를 빨아들이다가 보니 어느새 집중력이 쉽게 쉽게 붕괴되는 패턴이 그에게도 학습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건 중요해. 그래도 보다 고양된 상태의 연애를 하고자 했었기 때문에. 별 이야기도 없다가 갑자기 그 애가 내 엉덩이를 움켜쥔 게 아니란 걸 확실히 해야만 해서"



과거 시대의 문학사를 본떠서 서로에게 필명을 붙여서 불렀다. "싱클레어"가 "LOSER 17"이었고 "데미안"이 "커피색 머리"였다. "커피색 머리"가 좋아하는 "BL물"처럼 동성 간의 연애를 롤플레이하기 위한 필명이었다.


과거 시대의 편지를 흉내 내서 서로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고풍스러운 수단으로 대화하면서 전자기적으로 바로바로 교환하는 네트워크를 떠나 미사여구와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 글이 쓰였다.


다 쓰러져가는 철거되기 전의 "다세대 빌라"옆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전봇대가 있었고, 누가 쳐다보지도 않을 전봇대의 구멍이나 틈에 서로가 쓴 쪽지를 넣어 놓고 하루씩을 기다렸다.


물론,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매일 "커피색 머리"의 집의 방에서 만났지만, 그 방에서도 나누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있어 서로 갈증이 났다.


초기에 쓰인 편지는 지금의 "LOSER 17"에겐 차마 다시 기억해 보기 싫을 정도로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글이었지만, 점점 그럭저럭 1900년대 초반의 청춘 간의 사랑을 담은 번역체의 서한 같은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데미안, 오늘은 그대가 들어오지 않은 "브레이킹 셸"에서 입에 지옥의 "케르베로스"라도 머금은 듯 말투가 좋지 않고 예의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무법자 같은 이가 하나 들어와 난동을 부렸소.

그대와 그 돼먹지 않은 자를 굳이 비교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저 시뮬레이션으로 보는 아바타 그래픽일 뿐임에도 그의 추함과 그대의 아름다움이 최상의 천국과 지옥의 바닥 차이처럼 느껴졌소.

그대 이름만 생각해도 세상은 온통 빛의 천지이고,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변하고,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오. 오오. 이 뛰는 내 가슴은 온통 그대만의 것이니.

그대 모습에 생명을 얻고 그대 없는 곳에서 시체로 변하는 나는 오로지 그대로 인해 삶을 지탱해 가는 전설의 좀비 같은 존재요. 언제라도 찾아와 나를 살게 해 주오.

- 영원히 그대의 것인, 싱클레어"  
"싱클레어, 오늘은 제 구강의 미관을 다듬기 위해 성벽의 보강재처럼 설치한 교정기를 관리하러 치과에 들리느라 결국엔 이 세상에 있는 편견의 벽을 부스러 뜨리고 새롭게 깨어나는 그 공간에 잠시도 갈 수 없었네요.

치과 의사의 치과용 거울이 빛으로 반짝일 때, 그 섬광 속에서 그대가 나타난 듯한 착각에 빠졌고, 그것은 '아프락사스'의 형상과 당신을 오가며 제게 압도적인 전율을 일으켰지요. 잠시 생각만 해도 난 그대가 지닌 모든 가능성의 영상을 떠올리며 수많은 당신을 찾아 여행을 하고 있는 환상에 빠진 답니다. 예의 없는 이가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면, 저를 다른 가능성의 모습으로 떠올려줘요.

볼 수 없는 순간 당신이 혹시라도 시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두컴컴한 우물 바닥에 떨어져 며칠을 잠 못 자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함에 빠지게 되네요. 그런 순간에도 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광휘로 휘감기는 그대가 되기를 원해요.

- 모든 순간 오직 그대만 떠올리는, 데미안"  

이 글을 서로 주고받은 다음날 "데미안"의 집에서 "싱클레어"가 엉덩이를 잡힌 순간이 왔던 것이다.

(출처: Dall.E3로 그림)



"그래, 그러고 나서 어찌 되었던 거지?"

대중에게 전달되는 정보나 서로 간에 오가는 영상물 등등에 대해서는 유해성 진단을 실시간으로 내리고 차단 및 삭제를 하는 것이 "마스터"가 이전 정부로부터 인계받아 다시 자신의 시스템으로 지속하고 있는 검열 규칙이다.


이런 검열이 성적인 면에서 위선적인 사회를 만들어서 대낮에는 엄숙한 척 지냈지만 밤엔 어두운 곳에서 유흥산업이 번지고, 대부분 음성적인 성영상물의 유통확대도 도왔을 거란 추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마스터"는 그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다루지 못하고 지나쳤다. 근본적인 저출산 해결책을 샘플 분석을 통해 얻어내는데 일주일의 기간을 잡았기 때문에, 인간이 세운 원칙을 검토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지금은 내밀하게 한 범죄자의 의식을 샘플로 연구하는 목적에서 모든 검열 장치를 해제했다. "마스터"의 가슴이 뛰거나 동공이 확장될 린 없겠지만, 의식의 영상에 적용하는 해상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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