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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r 31. 2024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6-1

확실한 이별

(그림 출처: Dall.E3로 그림)

6-1 확실한 이별

그렇게 해서 당시에 잘 나가던 공동 투자 서비스 프로그램이었던 "버킷 레이싱"에 올려놓은 "일루미네이션 공원"의 시나리오는 "LOSER17"에게 "프로메테우스"사의 경쟁사로부터 제안이 오게끔 했다.


"이미 이 시뮬레이션 게임 시나리오는 '일루미네이션 공원'의 무료 게임으로 채택이 되어 있으니, 유사한 포맷으로라도 변형해서 사용할 의향은 없어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서 낯선 여자와 상담을 홀로그램 영상을 띄운 상태로 시작하게 된 "LOSER17"은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 등에 대해서 간략한 아이디어만을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집필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볼 수도 있어요"


"혹시, 프로메테우스사나 그 회사에 납품하는 업체와 체결한 계약서 같은 게 있나요"


"네, 있어요"


"어떤 형식의 계약서인지 내용을 좀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설마, "커피색 머리"가 자신에게 불리한 방식의 계약서를 작성해서 주었을 리는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LOSER17"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담은 계약서를 보여줬다.


파일을 받은 뒤에 전체를 읽지 않고도 몇 가지 키워드를 넣어서 계약서 내의 내용을 순식간에 파악한 상대편 여자는 홀로그램으로도 너무 명확하게 보이는 비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학업을 제대로 했으면 이런 계약서는 꼼꼼하게 잘 읽고 계약을 체결해야죠. 이건 중세 봉건 시대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노예 계약이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여러 문장과 항목으로 나눠서 전체적인 계약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몰랐겠지만 별첨 문서 부분에 들어가면 '프로메테우스'사를 포함한 기타 업체에 납품하면


95% 이상의 수수료를 당신이 지금 계약을 맺고 있는 회사에 줘야만 해요. 이 같은 구조에 대한 계약 기간은 실질적으로 20년이고요. 계약의 해제는 소속사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문장이나 표현, 수치가 계약서 상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자사 규정 A-9056, 통합 상거래 규정 904 RVS, 지재권 15조 9항 등등의 현재 당신이 소속된 회사에서 근거로 넣은 규정 내용을 잘 살펴봐야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어느 하나 제대로 확인 안 했군요"


친절하게도 자료 상의 복잡한 코드를 하나하나씩 보여주면서 관련해서 들어 있는 내용과 매치시켜 보여주는 내용을 보니 모든 것이 그 여자가 설명한 내용대로였다.


"게다가 페널티 조항이나 보안 사항 등은 더 무시무시한데요. 만들어진 작품을 유통시킬 때, 이전 작품과 유사한 패턴이나 내용이 있다고 소속사가 주장하면 이의 없이 받아들여서 보상해야 하네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아무 이야기도 더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 작품을 보고 계약 체결 등을 검토할 생각이 있나요?"


"이 계약의 핵심이 뭐냐면,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손해를 보면 그것마저도 당신이 배상해야 돼요.


우리가 지급하는 돈에서 5%만 당신이 버는 거고, 그마저도 소속사가 자신의 지재권에 포함되는 작품이라고 주장하면 그 돈을 돌려주거나 배상하라고 하는 돈을 더 돌려줘야만 할 거예요.


제가 봤을 땐, 우리가 계약을 하고 싶어 하는가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당신이 이런 손해를 모두 감수하고도 창작 활동을 계속할 의지가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한 푼 못 버는 자선행사와도 같네요"


"이건 민사 소송 같은 것을 걸면 제가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닐까요? 혹시 나중에라도 제가 좀 더 유명해지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된다면요?"


"글세요. 지금 뜨고 있는 '일루미네이션 공원'의 인기 무료 시뮬레이션 게임 "연쇄 연애 성공자"의 시나리오 작가가 당신이란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 물론 모든 손해를 다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감이 더 올 거고 업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거나 상을 받아서 이름을 알릴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스타일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다각도로 분석해서 그 소속사가 유사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공지능 작가를 여럿 만들어서 협업을 시킨다면 당신은 독보적인 존재가 되기 어려워요.


소송을 한다면 가늘게나마 이길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독보적이란 평가도 유명세도 갖지 못하고, 돈도 없는 상태에서 법무 법인 도움도 없이 하는 소송에서 이기긴 정말 어렵죠"


"상관없습니다. 보수의 5%만 받을 거라고 해도 괜찮아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되니 하게 해 주세요. 비슷한 작품이 아니면 문제가 없을 테니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게요"


"그냥 현재의 소속사가 원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게 그나마 남는 장사일 것 같은데요. 저는 당신이 더 불행해지면서까지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품질이 좋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아뇨. 이제 그 소속사를 위한 작품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당신 회사를 위한 작품만 만들게요.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른 직업을 졸업을 하고 구하든 간에, 불행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 겁니다"  



"정말로 바보 같았던 거지. 완전히 사랑에 눈멀어 아무것도 보지도 읽지도 생각하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그냥 '커피색 머리'가 하자는 대로 서명을 하고 계약서를 보내고, 만든 작품을 넘기고......


미래를 보다 밝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그 애가 내게 주었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어. 하지만, 언뜻언뜻 그의 눈에는 나를 동정하는 듯한 눈빛이 있었을 뿐이었고. 손길도 애완동물에 대한 것과 같았지"


"그래. 지금 그 생각과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니 분노와 거친 호흡, 빠른 심장 박동이 올라오는군"

"마스터"는 무선으로 연결된 모든 장치를 통해서 "LOSER17"의 의식 속의 생각과 영상뿐만 아니라 호흡과 체온, 심장박동, 체중, 체질량 등의 신체 상태를 감정과 더불어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애를 감정적으로 연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주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 그 낯선 여자와의 홀로그램 대화를 마친 다음날이었지, 수업을 마치고 같이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서 만난 거였어"



"마님, 너네 아버지 회사와 내가 체결한 계약이 엉망진창의 계약이란 걸 어제 알았어"


"무슨 헛소리니 너?"


"내가 너네 아버지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 내가 만든 작품을 혹시라도 판매하게 되면 95%의 수수료를 줘야만 한다는 내용이 꽤 교묘한 방식으로 작성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알았니?"


"그걸 내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왜 따지는 거니?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에 네가 작품을 제출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기업 "프로메테우스"에서 네 작품을 쓰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아니. 내 말은 계약서가 너네 아버지 회사에 너무 유리하게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었냐는 거야"


"유불리를 따지지 마, 네가 뭘 만들었는지나 생각해 봐. 아빠 회사에서 만든 "시뮬레이션 게임 시나리오" 제작 프로그램을 PD에 담아서 주지 않았다면 네가 그런 걸 만들 수나 있었겠니?"


"창작품이 하나 만들어졌다면 그걸 만들어낸 사람에게 권리가 제대로 주어져야 하는 게 올바른게 아닐까?"


"그런데 말이지, 그게 너 혼자만의 온전한 창작품은 아니지 않니? 네가 엉망진창으로 서툴게 만든 부분을 내가 적지 않게 편집해 줬잖아. 꽤 그럴듯하게 말이지. 상업성을 갖게 만들어 준 거라고"


"언제나 그렇지만 넌 참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해. 그런데 너 양심에 찔리는 게 있었던 거 아니니? 클라우드 펀딩 서비스에 올릴 때는 왜 편집자로서의 너의 이름은 뺀 거니?"


"양심이라기보다는 '동정심'이지. 거지 같은 친구의 계좌가 조금은 더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을 원했을 뿐야. 어차피 그 돈 안 받아도 난 살기 어렵지 않고"


"그건 내가 5% 정도 밖에는 네 아빠 회사를 벗어난 다른 회사의 주문을 받아서는 벌지 못하는 상황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는 고백으로 봐도 될까?"


"고백? 뭐 표현을 그 따위를 쓰니? 암튼 우리 아빤 네 생각을 여러모로 해주신 거야. 데뷔도 하지 않은 창작가가 자신의 공장의 인공지능의 도움까지 받아서 "프로메테우스"사가 원하는 납기도 지키면서 훌륭한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게 해 줬는데.


너랑 나랑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것만으로 그게 그냥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시스템에 맞게 만드는데 들어가는 기술력과 자본, 인력 등은 네가 그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95%가 아니라 100%를 가지고 가도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너네 아빠가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면 , 우리 아빠한테 사례를 해도 모자란 상황이란 말이야"


"LOSER17"은 이 상황에 더 이상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자신이 화가 났음을 깨달았다. "커피색 머리"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불현듯 느꼈다.


그렇지만 그건 증오심을 가지고 경멸하는 알코올중독 술주정뱅이의 폭력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절대로 그것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욕을 할 수도 있었지만,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제 '마님'같은 소리 더 이상 하지 않겠어"


"뭐, 나도 딱히 듣고 싶었던 호칭은 아냐. 촌스럽고"


"우리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너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벨도 없이 하란대로 시키는 대로 다했고, 사주는 대로 꾸역꾸역 다 먹는 애완동물 같은 역할을 해왔는데 말이지.


나같이 가난하고도 망가진 집안의 애를 너같이 부잣집에 머리도 좋은 여자애가 만나주는 것이 너무 황송하고 고마웠기 때문이었어 솔직히. 근데 말이야. 그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였니?"


"우리 사이에 무슨 사랑 같은 걸 이야기하니?"


"그래. 그냥 마님과 머슴 같은 관계였던 거지?"


"공주랑 근위병 정도라고 하자. 아니면, 계속 데미안과 싱클레어도 좋잖니?"


"그거 오늘부터 동등한 친구 관계로 만들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린 처음부터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었어"


이제야 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는 관계였음을 뒤늦게나마 확실히 알게 된 "LOSER17"은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우리 헤어지자"


뭔가 잘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색 머리"가 말했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하는거야?"


"무슨 은혜를 그렇게 대단하게 줬다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등한 관계로 만나지 못할 거면 나는 오늘 이후부터 너를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거야"


"주정뱅이 아빠한테 맞고 사는 게 불쌍해 보여서 귀여워해줬더니 이게 이젠 기어오르네!"


"그리고 이제부턴 너네 아빠가 무슨 의뢰를 하던지 받지 않겠어"


"그래 이 거지 같은 놈아. 네가 얼마나 더 가난해지고 망가지던지 이젠 신경 안 쓰겠어"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고. 원래도 신경 쓸 필요 없었지만, 관심 끊어. 그럼 이만 나는 간다"


"우이 씨. 이 자식이 진짜!"

"커피색 머리"는 좀처럼 이성의 어느 구석이 잘 무너지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이번엔 화가 많이 낫는지 자전거를 타고 있는 "LOSER17"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게 많이 아프진 않았지만 맞는 순간 "LOSER17"의 마음은 싸늘하게 말라붙었다. 그저 이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단 조선 시대의 양반과 노비의 관계였음이 드러난 것 같았다.


'쥐새끼처럼 살 순 없지'라고 혼잣소릴하며,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반지하방을 향해 달려갔다. 마음 속으로는 첫사랑이 여러 뭉치의 추억과 더불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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