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북 느린 진화, 양방향 시뮬레이션 게임 시동, 정통 영상물 한계
(표지 사진 출처: Medium)
내가 산 "L전자"의 TV는 그 카르텔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라는
쓸쓸한 상상이 시도를 할 때마다
온몸으로 번져왔다
2019년작 "밴더스내치"를 "넷플릭스 채널"에서 2023년에 발견한 순간 "블랙미러 시리즈" 중에 하나로 이 작품을 넣은 것이 일종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양방향 시나리오 진행의 작품이라는 마케팅 홍보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예고편을 현재 보고 있는 기기가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어 있지 않다면 볼 수 없다는 문구가 나오며 재생이 안되었다.
'이럴 수가, 2022년에 이사를 할 때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나름 고가의 최신형 TV로도 2019년작인 이 작품을 볼 수 없다니?'라는 당혹감을 던져주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작품은 필연코 꼭 대형화면으로 봐야만 한다는 고집이 마음과 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 1년여간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 여러 번 TV의 소프트웨어가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시도했었다.
그런데, '마치 너같이 최신 TV가 아니거나 좀 더 비싼 스O트 TV나 애O TV 같은 것을 갖지 못한 놈에겐 이것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라는 완고한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광고만 보여주다 영상을 끊었다.
어쩌면 몇 개의 TV회사하고만 결탁을 했는지도 모르고, 내가 산 "L전자"의 TV는 그 카르텔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라는 쓸쓸한 상상이 시도를 할 때마다 온몸으로 번져왔다.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집에서 보는 TV보다
작은 화면으로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러다 지난 일요일에 "찔러보기 시리즈"를 작성하기 위해 영화를 하나 골라보려고 하던 때에 "넷플릭스"를 오래간만에 아이폰으로 보면서 "밴더스내치"를 찾아 눌러봤다.
'.......' 이럴 수가, 아이폰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이 작품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양방향 작품의 콘셉트에 맞게 스토리 진행을 뒤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전에 느낀 열등감과 쓸쓸함은 뭘까?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왜 고집을 피우며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꼭 큰 화면으로 봐야만 한다고 믿고 싶어 했는지를 곧 아이폰의 작은 화면으로 보면서 깨달았다. 임팩트가 기대만큼 오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양방향 게임을 아이폰이 되었든, 그 옛날 게임기가 되었든, 좀 더 역사를 뒤돌려 1980대 말경으로 가자면 "에드워드 팩커드"가 만들어 당시 세계의 소년소녀 모두를 유혹한 게임북 "너 자신의 모험을 선택해 시리즈" 총 12권과 이후에 수없이 만들어진 유사 서적을 통해 즐겼던 과거가 떠올라서였다.
그 시리즈의 원제는 "Choose Your Own Adventure"인데, 아직도 아마존에서 별 다섯 개를 받고, 킨들로 볼 수 있는 전자북으로는 $7.99, 종이책으로는 $19.90이다. 아직도 인기가 좋단 이야기다.
따라서 이런 내용의 작품이나 유사한 게임을 "밴더스내치"를 보기 전에 여러 번 해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집에서 보는 TV보다 작은 화면으로 보지 않기를 권한다. 모니터 사이즈도 비추다.
1. 버려야 할 선입견
1) 상위버전 TV 가 없으면 보면 안 되는 작품이다(X)
2) 색다른 양방향 게임 영상일 것이다(X)
2. 밴드스내치, 찔러 보기
1. 버려야 할 선입견
1) 상위버전 TV 가 없으면 보면 안 되는 작품이다(X)
집에서 보는 TV로 "넷플릭스"를 연결해서 이 작품을 보려고 시도할 때, 만약 그 TV가 볼 수 있는 사양의 TV가 아니니 볼 수 없다고 놀리듯이 광고 영상 중간에 끊길 때 열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사양의 기기가 무엇인지를 찾게 만들고 그것이 더 팔리게 만들고자 하는 고도의 번들링 마케팅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물론 실망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모바일 기기로 보시라. 이미 넷플릭스엔 양방향 게임 형식 영상으로 이미 보편화된 것은 "베어 그릴스"의 작품도 있고 다른 애니메이션도 있다(볼 수 있는 기기 사양을 전혀 따지지 않는다).
이 작품이 보기 어려운 버전의 작품처럼 포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마케팅적인 술수가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같은 이에게 이건 꽤 효과적이었다.
2) 색다른 양방향 게임 영상일 것이다(X)
물론, 마이너 하게나마 기존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게임이나 영상물과 약간의 차별성을 갖고 있는 요소가 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색다르다고 이야기를 할 만큼의 확 다른 차이는 없다.
1980년대 말에 "에드워드 팩커드"의 게임북 중에 히트작인 "누가 할로우 쓰롬비를 죽였나"를 보면서 느꼈던 신선함에 이를 만큼 흥분감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다만, 약간 의미 있게 다를 뿐이다.
2. 밴드스내치, 찔러 보기
약 1시간 30분가량을 소요하면 선택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일정한 몇가지 엔딩에 도달하는 영상을 시청하게 되는 구조다. 중간에 예기치 않게 게임이 끝나는 길로 가게 되기도 하지만 선택 후를 미리 예상하기는 쉽지 않게 신경을 쓴 흔적이 느껴진다.
"밴더스내치"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게임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개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토끼 인형"을 시간 맞춰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먼저 기차를 혼자 타고 떠난 엄마가 죽었기 때문에, 말리지 않은 아빠와 인형을 못 찾아 엄마만 보낸 자신을 원망한다.
이 과정에서 이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진 주인공은 아빠와 왠지 정상적이지 않은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며, 이후에 선택에 따라서는 죽이기도 한다. 이것은 나이 어린 소년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쾌감을 전달코자 하는 신호로 보인다.
이후에 이 콤플렉스를 더 지독하게 해소하면서 만든 게임의 질은 더 많은 호평받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해서, 이 작품의 시나리오나 콘셉트를 만든 창작자가 이 콤플렉스에 확실하게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거나 그 콤플렉스의 해소에 따른 창조 능력의 상향 등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참조하는 원본 게임북이 "밴더스내치"인데, 이 작품의 작가가 심각한 강박관념과 망상으로 인해 아내를 토막살인하는 인간으로 나오고, 이에 영향을 받는 주인공의 모습도 나오고 있어서, 괴이하고 어두운 면도 충분히 노출하면서 스릴러물 같은 모습도 일부 지니고 있다.
"매트릭스"를 노골적으로 참고해서 그 작품에서 나왔던 상황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한 장면도 나온다. 일명 "매트릭스교"라고 불리는 우리는 현재 가상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극화 속 "콜린"의 대사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모피어스"의 젊은 버전 같을 정도였다.
게임의 선택 과정 중에는 "메타인지"를 자극하기 위해서 게임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극화 속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심리분석 상담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넷플릭스의 사용자가 하자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임을 알게 되는 낯선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이 같은 내용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될 경우에 또 다른 엔딩을 찾게 되는 과정도 이 극화 속에서 선택을 나누는 "트리 형식"의 도표로 그려진 게임 시나리오가 반복됨으로써 보는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 같은 양방향 게임이나 영상물이 만들어지는지를 상세하게 알게끔 해준다.
나는 이 같은 작품이 좀 더 폭발적인 환영을 받기 위해서는 현실의 공간에서 떠오르듯이 나타나는 "홀로그램 형식"의 그래픽 또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개념으로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디테일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이 최근의 AI 영상, 음성, 음향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각만큼 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제작비와 배우의 개런티, 로케이션의 한계, 비용상의 한계, 복잡성을 확대하는 것에 대한 장애 등이 해소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AI기술로 양방향 게임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를 구상함과 동시에 바로 작품이 실사화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을 내 소설인 "연애 실연 17범의 고백"에서 한번 써봤다.
물론, 그건 그다지 신선하지 않은 상상이긴 하다. "토털리콜"과 "써로게이트", "매트릭스", "레디 플레이어 원" 등의 영화가 그 같은 상상의 시뮬레이션 세계를 좀 더 빨리 현실 속 세계로 가져오게 만드는 방아쇠의 역할을 가지고 적지 않은 우리에게 사전 경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상에서 만들어진 징검다리 같은 작품이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