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Aug 12. 2024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창작자로 각성하는 의식

누가 뭐라고 해석했든 상관없이 창작자의 관점에서 오독해 보다

(그림 출처: CoAR)


이 작품이 개봉되었을 때 또한 들썩거리던 언론과 각종 유튜버와 유명한 평론가 등이 해석을 해서 올려놓던 수많은 이야기를 몇 편 보았지만 본 기억이 희미해지고 거의 다 잊었다고 판단된 오늘 봤다.


그때에야 온갖 현란한 지식과 정보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해부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을 파헤치며, 연관된 책과 일본의 역사를 다시 복기해서 들어가는 수많은 해석을 위한 노력이 펼쳐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잠하고 아무도 그때의 해석 중에 무엇이 더 올바랐는가 더 이 작품의 진정한 의중을 꿰뚫었는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그 모든 해석에 바치는 나의 결론만 말하자면 "유명한 사람이 꼼꼼하게 논리적으로 여러 자료 조사해서 하는 말이면 그게 맞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리나 피타고라스 정리 같은 오래되고 틀릴 수 없는 개념만을 모아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주인공(과 관객)의 염증이 나타나는 내용을 간과해서 만들어진 해석들 같기도 하다.


(출처: Etsy)


그 당시에야 이런저런 유튜브에 나온 이야기를 보다가 정말로 이렇게 해석해야 할 작품이라면 나같이 대중적인 수준에서 겉핥기만 할 양식의 소유자가 볼 작품이 아니구나라는 위화감이 생길 정도였다. 뭐 하나 잘못 이해하는 말을 올렸다간 두드려 맞고 체면이 크게 손상당할 거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 해석하기 놀음이 몰아쳤던 덕에 더 많이 극장으로 사람이 찾아가는 방식으로 흥행을 폭발시키는 데 있어 "애매모호함"이 남아 있는 작품의 가치는 높다.  


하지만 난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지브리 스튜디오"가 그런 애매모호함 속에 관객과 시청자를 빠뜨려서 괴롭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악의"에 가까운 취향을 가진 창작자 집단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렇게 복잡한 시선을 갖지 않고 저마다 자신의 판타지 해석 능력과 경험, 추억, 삶을 통해 만들어진 관점으로 틀리게 보든 말든 생각하고 느끼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회에서 작품의 흥행이 더 높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든가 "임금님이 발가벗었어요"라고 외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는 사회에서 더더욱 이 작품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즐기기도 더 좋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나란 "창작자"가 보기에 이 작품은 일본에 있는 한 명의 창작자가 근대 역사와 더불어 거대한 문화와 문명의 무게가 쌓이면서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과 멍에를 벗어던지고 보다 자유롭고 넘치는 창작의 에너지를 갖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발휘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있었다.

(출처: Los Angeles Times)


80대 초의 "미야자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목으로 담았기에 무거운 주제가 이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제목의 의미를 과잉된 사고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지면 재미가 없다.


남이 내게 걸어놓은 전통의 족쇄를 벗어던지면 그다음에 경험하게 되는 인생의 의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정도의 삶의 교훈이 읽힌다.


주인공 "마히토"는 자신의 어머니가 전쟁 중의 병원의 화재로 인해 죽게 되는 인생의 커다란 불행을 맞게 되고, 그 트라우마에 빠져서 한 발자국도 제대로 인생을 향해 걸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출처: Vulture)


그 슬픔으로부터 걸어서 나와서 자유로운 "창작자"로서 세상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판타지와 더불어 "지브리 스튜디오"식으로 잘 풀어낸 것이 이 작품의 묘미였다고 느꼈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 하늘로부터 날아온 정체불명의 구멍이 송송 나 있는 거대 운석 위에 집을 짓고 나서 그 공간에서 신비한 일이 벌어져왔다는 내용을 깔고 있다.

(출처: IMDB)

이것을 굳이 해석해보고자 하면 일본이 바다 건너온 거대한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였던 과거를 상징적으로 넣어놓은 듯하다. 주인공의 외증조부는 너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존재로 설명되지만 알고 보니 이 탑에 연결된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출처 : Film Colossus)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코자 하는 아버지에게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반항하며,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돌로 찍어 자해하고 집을 탐험하는 기회를 잡은 주인공은 이 탑을 더 깊숙이 탐험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험과 마주하게 된다.


왜가리가 저택을 날아다니면서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얼굴이 몹시 큰 남자가 몸에 들어 있는 형태로 변신을 하며, 저택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이 모두 커다란 얼굴을 하고 있는 것 등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전작의 장치가 깨알같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출처: Vulture)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의 아이를 임신한 새어머니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코자 하는 이임을 알게 되고, 이미 죽은 어머니의 과거 소녀 때의 모습을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되는 일종의 살풀이 같은 제의가 벌어진다.


(출처: CBR)


사람을 포함한 여러 가지 생명체를 잡아먹는 것을 즐기는 "앵무새"란 존재는 깊은 생각과 이해 없이 지껄이는 언론이나 모사를 반복하는 창작가 등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들고,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앵무새로 돌아가 사람에게 똥을 싸서 묻히는 게 전부인 존재로 나온다.

(출처: Vulture)

외증조부가 했던 일은 이 세계의 공간에서 거하며 13개의 도형으로 만든 탑을 쌓아 올려 현실의 세계와 이 세계의 균형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 세계의 존속을 위한 일이고, 이제 너무 많은 나이가 먹었으니 이 일을 증손자인 주인공에 맡기려 하지만 망설이는 중에 앵무새왕이 별안간 도형을 부순다.


"앵무새왕"과 "앵무새"가 이 작품 속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것은 나름 의미심장한데, 평론이나 기사문을 포함한 여러 여론 등에 의해서 수시로 공격당하고 상처 입어왔던 "미야자키"가 작품 속에서 이들을 다소 귀엽고도 어리숙한 존재로 표현해서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거란 혐의가 느껴져서다.


하필이면 그중에서 제일 힘세고 권력이 높은 "앵무새왕"이 그 오랜 세월 같이 이야기를 해왔던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인 창작자인 외증조부"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도형의 탑을 쌓아 왔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쌓아 올린 뒤에 문제가 생기자마자 엉겁결에 칼로 부숴버리는 장면은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Fantasy/Animation)


정말 "창작"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이가 "창작물"을 얼마나 심하게 오해하고 때로 잘못 다루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파괴한 뒤에 같이 망가져 가는지를 짧은 순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작품에서 노골적이고도 직선적으로 나온 메시지는 너무 순진한 것이라 이른바 "작가주의적" 분석을 한 이들은 잘 다루지 않았던 기억이 언뜻 난다. 그곳에 평화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길을 향해 갈 것이란 메시지가 들어 있고, 권선징악도 들어 가 있다. 애매모호한 선과 악의 혼돈 속에서도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이 많은 평론과 리뷰, 기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이야기에서 일부 모티브를 가져왔겠지만 그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하길 꺼리게 된다.


창작자는 물론 자신의 삶의 경험과 주변인들의 삶, 살고 있는 가정/사회/국가 등의 공동체 등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적지 않은 창작자는 나를 포함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작품으론 온전히 제대로 만들어 내기 어렵다.


삶 속의 이야기는 변형되고 이 같은 판타지 장르의 작품에서는 분해되어 이야기와 섞이며 원래 원본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기 일쑤다. 어설픈 창작가인 나를 빌어서 보자면 그렇다.


물론, 나는 창작가의 전형이 아니므로 이걸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수기가 있고 르포가 있으며 자서전 등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장르가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극화를 만들어낸 창작자에게 자신을 발가벗겨 드러낸 작품이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 취향과는 잘 맞지 않는 것이다란 수준의 썰이다.


내가 창작자로서 극화를 만들어서 이해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작품에 한정된 것이길 원할터인데, 내가 살아온 이야기나 주변 얘기는 왜 갖다 붙여야 할까? 범죄자 프로파일링도 아닌데 말이다.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벌어지는 개인신상 정보 파기를 올바른 작품 해석 행위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의 삶과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지만, 그의 삶이 그러해서 작품의 의미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해석은 창작과 해석의 가능성을 왜곡하는 행위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