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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21. 2024

바비, 돌려 보기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분배되는 과정에 대한 우화

그래서 그 영화의 주제는 다른 곳도 아니고 "헬렌 미렌"의 대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마고 로비'가 자신의 외모가 형편없다는 대사를 하게 할 거면 차라리 출연시키지 마세요" 이렇게 들렸던 대사가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해온 감각이 없는 평론가라면 아마도 이 대사에 큰 의미 따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내내 이 영화가 꽤 괜찮은 글로벌 흥행을 했다는 사실이 살짝 안 믿어지려고 하는 냉소가 마음에서 번지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 "오펜하이머"와 같이 흥행 쌍끌이했단 기사도 있다.


(출처: The Hindu)


반세기를 살아온 중년(이지만 아직도 아직 덜 큰 것 같은 어리숙함을 달고 사는)이어서겠지만 "오펜하이머"와 비교하자면 광범위한 연령대를 통틀어서 "오펜하이머"가 흥행성과 작품성 모두 더 높다.


그럼에도 팽팽한 미모의 "마고 로비"와 우수에 잠긴 미남자 "라이언 고슬링"이 근육으로 무장하고 등장해 주었으니 일단 극장으로 가고픈 젊은 남녀의 마음을 더 이끈 것은 이 둘이었을 것이고, 장난감 "바비" 인형을 다룬 탓에 어린이층까지 넓게 관객층을 포용한 "바비"가 더 개봉 흥행이 좋았다.


한국 사회는 페미 논쟁이 흥행에 불을 지펴서 성공작이 탄생하는 경우(캡틴 마블)도 있고, 그 반대로 폭망으로 이끌어지는 경우(마블스)도 있는데, "페미니즘"인지 아닌지 싶은 애매모호함을 지향한 이 작품은 흥행 실패이긴 하지만 수백억 원을 투자한 한국 영화(더 문)와 비슷한 수준의 흥행을 했다.


하나뿐인 아들과 같이 가서 보기엔 뭔가 좀 이상하고 아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중년의 아저씨가 혼자 가서 보기에는 로리콘 따위로 찍혀서 더더욱 곤욕스러워질 것이 뻔한 이 작품을 한국의 극장까지 가서 볼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기회가 생겨서 봤다.


그런데 이 작품이 보고 난 뒤에 글로 써서 내가 어떤 작품을 봤다는 기억을 인출할 만큼 의미 있는 작품을 봤다는 무게감을 한참 동안 주지 않았다. 봤지만 그저 안 본 것처럼 잊어버려야 하는 작품일까?



"제4의 벽"이라고도 하고 있어빌리티를 장착하면 "메타 픽션"이라고도 불리는 작품 속 인물이 현실의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연출 방식이 있다. 이제는 공공연히 많이 나와서 식상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명확히 그런 방식의 연출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극 중 내레이션을 제공하는 "헬렌 미렌"이 여러 가지 "바비 랜드"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상태에서 “바비”가 자신감을 잃고 자신의 외모를 추레한 것으로 말하며 멘털이 붕괴된 대사를 울며 하는 장면에 그 같은 연출이 잠깐 이뤄진다.



(출처: The Independent)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이렇다. "'마고 로비'에게 이런 대사를 시키려면 차라리 캐스팅하지 마세요." 이 기억이 그래도 다시 내 안에 재구성된 "바비"를 만들어줬다. 기억나지 않았다면 쓸 기회는 영영 사라졌었다.


왜 그 기억이 떠올랐는가 하면 그 대사가 어쩌면 전반적으로 어울리는 작품이 될뻔한 영화가 "바비"였을 수 있었다는 이미지가 내 의식과 무의식을 살짝 지배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꿈속이나 상업적으로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시킨 "판타지"를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는 "바비 랜드"와 현실이긴 하지만 실제의 현실과는 다른 관념적인 논쟁과 소비자와 인형 간의 접점, 실제로 "바비" 인형 시리즈를 만든 "마텔사"를 그저 별생각 없이 만들어진 기본적인 여성성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고 싶어 하는 사회적 저항치곤 낮은 강도의 압박으로 표현하며 전반적으로 달짝지근한 맛을 남겼다.


그저 인형으로 만들어져서 장난감 속의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자신의 발이 "하이힐"이라는 "바비"에게 부여된 여성성의 조건에 맞춰 이미 경사진 아치를 그리며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아치가 무너지면서 평평하게 펴져 땅을 뒷꿈치가 딛게 되면서 겪게 되는 정체성의 위기가 애교처럼 흐른다.


(출처: Yahoo Entertainment)


블록버스터급의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 만큼의 가벼운 자극정도만으로 스토릴 최대한 억제하고 맹숭맹숭하게 만들어 원천적으로 남녀 모두가 지니고 있을 만한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감을 무너뜨려 영화를 보게 만든 오랜 배우 경력과 더불은 여감독 "그레타 거윅"에겐 타협점을 제대로 찾은 작품이다. 인형 판매도 늘었다.


(출처: Mattel Film Wiki)


저항감을 전혀 갖지 않은 상태에서 보게 된다면 이 영화는 그저 "바비" 인형 시리즈가 여자 아이들에게 불어넣은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대한 여자로 자랄 수 있을 것이란 판타지와 확장된 몸매와 인종의 다양성 등등을 갖춘 바비의 모습이 단지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한 여러 노력의 결정체였을 뿐이고 더 여성의 인권을 향상해 내기보단 다양한 성상품화로 흘렀음을 은근히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원래는 "바비"의 보조물 성격의 인형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등장한 "켄" 인형 시리즈를 그저 보조물로만 부리는 것에 익숙하게 취급하던 "바비"가 "켄"이 외부 현실에 들렸다가 가지고 들어와서 "바비 랜드"에 뿌린 "가부장제"와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말"에 의해서 원래의 "바비 랜드"의 서열구조가 완전히 망가지고 실제 현실의 남녀 차별을 더하게 구현하는 역전이 벌어진다.


이 역전된 세계에서 "미숙한 남성성"이 가진 약점(허세와 질투심, 독점욕 등등)을 이용해서 다시 "바비"와 "켄"이 화목하게 조화로워질 수 있는 새로운 "바비 랜드"를 구성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과 권력, 힘을 걸치고 리더이고자 했던 "켄"이 그 부담감을 떨치게 되는 것은 사회에서 규정한 남성성의 정의가 남자에게도 힘든 짐이었음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장면인긴 하다.


이 과정에서 종종 "쥐라기 공원"같은 가족 영화에서도 그려졌던 "수익성"의 노예가 되어 수많은 소비자가 죽건 말건 "공룡 공원" 상품을 허투르게 관리하고 퍼뜨리는 "기업 자본의 해악"같은 주제는 사라져서 그저 "마텔"은 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미숙한 경영인의 회사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마치 PPL처럼 걸치고 벗고 던지기도 하는 의상이나 액세서리를 구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여주고 끝의 타이틀롤이 올라갈 때 극 중 언급된 실제 인형의 광고나 모습이 나오는 것은 마치 이 영화가 "바비" 인형의 역사를 경외하고 제대로 되살려 그것을 홍보하려고 만든 영화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오랜 시간 기업 활동에 매여서 급여를 받아오면서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회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악전고투를 하기를 거절하지 않고 맹렬히 살아온 직장인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감독의 작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된다.


"룰루레몬 스토리"에서 "룰루레몬"의 창업주였던 "칩 윌슨"은 이 같은 대형 기업의 활동에서 잔뼈가 굵었던 이들이 자신이 만든 "룰루레몬"에 고용된 뒤에도 그 안에 있는 성공 공식을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원래 해왔던 일을 그냥 이식하려고 한 탓에 성장성을 잃게 되었음을 비판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우수한 경영인으로 그런 이가 자사에서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일리가 있단 생각도 한다.


(출처: Thought Economics)


진짜로 위대한 이는 자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 균형감이 있는 사고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오랜 배우 생활을 해온 "그레타" 감독은 여성성에 덧 씌워져 있는 판타지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 여성 자체가 생존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사용될 것임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의 주제는 다른 곳도 아니고 "헬렌 미렌"의 대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마고 로비'가 자신의 외모가 형편없다는 대사를 하게 할 거면 차라리 출연시키지 마세요" 이렇게 들렸던 대사가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정 이상의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한 적이 없거나 하지 않아 감각이 없는 평론가라면 아마도 이 대사에 큰 의미 따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고 여성의 위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특정의 개인에게 맞고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은 또한 그대로 인정 받아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이란 것이다.


젠더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다름에서 오는 특별한 매력 포인트가 남김없이 증발한 사회가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어느 쪽의 손을 더 들어주었다기 보다는 서로의 고충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이해하고 각 젠더 간의 만족스러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정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내용이 통상 부족했기에 어쩌면 관객에게 해갈이 벌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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