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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Oct 06. 2024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돌려 보기

내면의 불가사의 해석 vs 신앙의 불가해함 이해

10월 3일에 시차 적응에 실패한 상태로 LA에 도착해서 그날 일정과 4일 금요일을 아이와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전투적으로 하루에 최대한 많은 놀이기구와 쇼를 보기 위해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면서 보낸 뒤에 그만 토요일 전체를 훌쩍 한국시간으로나 미국 LA의 시간으로나 보내버렸다.


지금도 몹시 피곤하고 수년만에 만난 부모님과 그 부모님을 처음 보는 외동아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조율을 하면서 이곳의 일정을 보내며 독자와의 약속을 저버린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긴 했다. 이렇게 한 회쯤 빠지더라도 생업이 아닌 글쓰기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하루 이렇게 예정된 일자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채근하거나 왜 안 쓰고 있는지 묻는 독자도 없는데, 꼭 써야만 하는 글쓰기를 하는 게 맞긴 할까? 불성실함에 기분이 안 좋으면 구독해지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지는데, 그전에 썼던 글의 일부분이 모순에 빠진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글을 예정된 일자에 맞춰서 쓰기로 한 것은 독자와의 약속 이전에 나와의 약속이자 계약이다.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동기보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고 그저 쓰이는 대로 쓰는 것이 이 글쓰기다라고 수 번 써오고 이야기해 왔다.



정말로 쓸 것이 없다면 지금 안 쓰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안 쓰면 될 것을...... 이미 타고 오던 비행기 안에서 2편의 영화를 봤고, 그중에 하나는 쓸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버렸고, 하나는 쓸 것이 있는 상태로 이 피곤한 몸속에서 하나의 영화 리뷰로 빠져나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괜히 이런 "있어빌리티"를 발휘하고 싶진 않고, 그냥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커 2편"이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스토리로 전편에 제대로 구현된 "조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극 중에 단호하게 처벌한 덕에 흥행이 어려운 작품이 되어버렸다는 정도의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마담 웹"을 마음 한구석 "마블 코믹스"로부터 파생된 "MCU"를 아직도 흠모하는 마음에 비행기 안에서 보긴 했다. 새로운 미모의 배우가 그보다 어리지만 또한 풋풋하고 매력적인 틴에이저 3명과 함께 만들어가는 나름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보다 훨씬 유명해져 버린 "거미"로부터 얻은 파워로 인간 사회를 구하는 "스파이더맨"과 비교했을 때, 이전의 “배트맨”의 망가진 아류처럼 보여서 망작이 된 "모비우스"의 기시감이 떠오를 정도로 처진 아류의 느낌이 강했다.


이 이후의 후속 편을 만들게 되기를 기대하고 나온 배우 간의 앙상블을 제대로 이루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느꼈고,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가 "타임 스톤"을 이용해서 시공을 자유자재로 오가듯이, 미래를 미리 다녀와서 현실에서 그 미래에 대응해서 바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도 결합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다른 성공작보다 더 증강되고 잘 편집된 각본과 연출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심심했다.


이 작품에 대해서 감상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이 이상의 내용으로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싱겁기 그지없었다. 맹탕을 먹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롭게 참여한 작가의 능력이 떨어진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MCU 작품"의 새로운 캐릭터가 먹히지 않을 정도로 이전에 이미 받았을만한 자극은 모두 받아 버린 것인지 싶었다.


그러고 나서 틀게 된 작품이 이제 리뷰를 쓰고자 하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다.


  


이 작품에 관심이 간 것은 "니체는 왜 눈물을 흘렸는가"란 소설에서 나타났던 "프로이트"와 "데인저러스 메서드"란 영화에서도 나타났던 "프로이트"에 대해서 할말은 있었다. 아주 많은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그의 책을 읽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론 수준의 지식을 익혔던 청소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저서에서 공식/비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하고 있는, 인류가 자신이 그저 이성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심리"에 의해서 말과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통찰을 임상실험과 더불어 선사한 "반지성주의"의 거두이기도 하며, "결정론적"인 입장을 지닌 채로 강력하게 정치적인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자신의 학문을 당대에는 완벽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던 고전적인 존재로 불리는 학자다.


이 학자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각각의 극화에서 나타날 때마다 그는 마치 각각의 다른 성격과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다채로운 측면을 노출했고, 이 작품에서도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내가 본 영화 속에서는 2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데인저러스 메서드"에서의 정치적으로 치밀하고 유대인 중심주의이자 완벽주의자로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준 "비고 모르텐슨"의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안토니 홉킨스"가 보여주는 "프로이트"는 "양들의 침묵"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교수"를 일부 떠오르게 만드는 냉철함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취약한 내면을 털어놓는다.


"라스트 세션"이라는 제목답게 "프로이트"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시점이자 2차 대전 발발 시점인 1939년에 자신이 불러서 만나게 된 "무신론자"에서 "기독교도"로 개심한 "기독교적 변증법"의 "C.S. 루이스(매튜 구드가 연기)"와의 대화 속에서는 매우 "말랑말랑"하며 원래 "유신론자"로서의 생을 시작했던 자신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유신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한다.  


(출처: The Arts Desk)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명실공히 "프로이트"이며, 그와 더불어 그의 딸인 "아나 프로이트"와 그의 동성연인인 "도로시"가 등장하여 당시의 사회상이 엄격히 동성애를 배격한 상황에서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얼마나 "동성애"에 대해서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대의 "차별을 배격하는 흐름"에 오히려 맞는 사상을 어떻게 그때 갖고 있었는가가 은연중에 짧은 대화 속에서 나타난다.


(출처: Kinorium)


"할리우드"가 이 작품을 만들어 배포할 시대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신론"과 "유신론"간에 싸움을 붙이는 것보다, 각기 다른 사상에 있어서 보다 열려 있는 사고를 지닌 이가 사회적 고정관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이 시대에 아직도 첨예하게 대립된 사고관을 가지고 싸움을 반복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고 본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C.S. 루이스"는 자신의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를 만나는 긴 기차 여행길에 오르며, "프로이트"는 구강암에 걸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종교적 진실을 "루이스"에게 고백하여 알리고 자신의 딸의 "동성연인"을 인정해야 하는 자신이 계속 지체시켜 왔던 시점에 와닿게 된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죽어가는 자는 약해지고 그가 어렸을 적에 경원시하던 것에 대한 그리움에 다시 붙잡히기도 한다. 과연 "프로이트" 역시 길고도 첨예했던 "무신론"의 시간을 접고 죽기 전에 다시 종교에 귀의하려 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의 답을 영화는 그저 애매모호하게 남길 뿐이고 "루이스" 역시 이 논의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함을 얻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작품에서 "무신론"이 되었든 "유신론"이 되었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잔잔하게 전하는 내용은 그 어느 쪽 진영에 속해있든 간에 그들은 고민하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세계에 대한 해석의 기준도 달라지는, 인간이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들이라는 깨달음이자 생각이나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증오하고 처단하는 무지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향해 그동안 걸어왔었던 인류가 마치 한걸음도 그런 걸음을 걸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더 무지한 방향으로 다시 휩쓸려 돌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이 작품이 던지는 교훈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내적진실이 만든 신념을 함부로 부수지 못하며 그러고자 하는데서 인위적인 왜곡과 조작이 벌어진다. 그 최종적인 내적진실을 발견해 가는 최후의 세션이 내게도 왔을 때 이 작품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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