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이 펼쳐지지 않길 원하지만, 계속 그럴 순 없을 것 같아 섬뜩함
(표지출처: iMBC)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은 실제 있을만한 현실과 엄청나게 먼 거리를 느끼게끔 만드는 미장센과 음악, 극단적인 결말 등의 요소 때문에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벌어질 순 없을 것이란 안심감을 주곤 했다.
리얼리티를 갖게끔 상세한 디테일을 부여해서 그럴듯함을 느끼게끔 만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에 관객이 좀 더 몰입하게끔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하고 느껴왔다.
그렇지 않고선, 그의 어떤 작품들은 너무 잔인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헤어질 결심"은 또한 잔혹함이 배가되어 있는 작품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에 있는 비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자극하면서도 잔인함을 비껴나갈 이유가 되었다.
이 작품은 하지만 너무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심지어 엑스트라 같은 역할조차 맡아서, 등장하기 때문에 익숙한 외모가 보여주는 은근한 리얼리티가 극을 계속 보게끔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병헌과 손예진이 부부로 나오는 조합은 나름 조화로웠다. 조연을 받아들인 이성민과 차승원, 박희순 등의 배우는 다른 작품에서도 충분히 단독 주연을 맡을 급의 중량급 배우인데, 이 작품에서 조연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명품 조연급인 염혜란과 유연석, 김해숙, 오달수, 오광록, 이용녀, 윤가이의 모습이 존재감을 갖기가 좀 더 힘들어져 보였다. 상당히 많은 유명 배우가 참여한 것은 장점이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포인트가 흐트러져 사라진다는 단점도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같은 경우 "이병헌"이 맡은 "빌런"은 사회적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복잡한 포지션을 제대로 연기한 주연배우인 그의 존재감이 오랫동안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는 빌런은 빌런이되 그의 존재감은 여러 배우에게로 분산이 되어 옅어 보였다.
극 중 비자발적인 "킬러"가 된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이제는 사양 산업화되고, 공정이 자동화됨에 따라 더 이상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은 통에 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한 뒤에 자기가 전문가로서 인정받았던 일을 하고자 하는 집착과 더불어,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살고, 아내와 아이 둘과 애완견 두 마리를 모두 이전과 같이 키우며 살기 위해, 취업할 자리에 있는 인물을 죽이고 경쟁자도 죽인다.
이 과정에서 극이 택한 문법은 AI 등의 첨단 문명의 발달에 따라 효용성을 잃고 그때까지 가꾸었던 물적 기반을 잃게 되는 가장이 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자신과 비교될 수 있는 경쟁자를 파악해서 죽이는 것이 이른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한쪽에선 이 같은 비극과 참혹한 현실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는 척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자신이 인정받았던 일만이 삶의 의미였던 "구범모(이성민이 연기)"는 해고당한 뒤에 모든 일체의 다른 일을 할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나오는데, 극 중 최초의 희생자인 그를 죽이러 간 "유만수"는 자신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상태인 그가 다른 선택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사는 삶을 비난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게 결국 자신에게도 통하는 말인데.
그러다가 "구범모"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다가 죽일 것을 망설이던 그는 자신의 뒤에 몰래 와서 거대한 조상물로 내려치려던 중에, "유만수"의 비난하는 말에 동조하며, 남편인 "구범모"에게 욕을 하던 그의 아내인 "이아라(염혜란)"에게 당황하던 차에 얼떨결에 그만 한 발을 "구범모"에게 발사한다.
이 과정에서 총을 떨어 뜨린 뒤에 3인이 서로 몸싸움을 하며 총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실제로 "구범모"를 쏴 죽인 것은 "유만수"가 아니라 "구범수" 몰래 다른 젊은 남자 배우와 불륜 중이었던 "이아라"이고 그가 총을 들고 "유만수"를 쫓아와 죽이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이 극이 허술하게 흘러가는 부분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합리하고 생각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타입의 "이아라"의 즉흥적이고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윤리적인 기준 같은 것은 가지지 않은 행동과 증언에 의해서 극이 진행되고, 결과적으로는 살인자 2명이 그대로 극 중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이익을 취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 전체적인 구조인 데서 나타난다.
여기에는 솔직하게 아무런 바로 선 메시지 같은 것이, 뭐, 사실 있어야 할 필요도 없겠지만, 보이질 않고 추리도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런저런 자극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시청각적인 충격 등을 관객과 시청자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내용은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퇴직을 당한 이후에 팔려고 한 주택을 친구 중의 하나에게 팔려고 했을 때, 유부남이면서도 아내 몰래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우러 다니고, "유만수"의 부인인 "이미리(손예진)"에게도 추파를 던지는 그 또한 "이아라"와 다를 게 없는 비윤리적인 인물이 하나 등장해서 "유만수"와 "이미리"의 아들이 저지른 절도죄를 무마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잠시 "이미리"가 미인계를 쓰려고 하는 장면이 나와서 시청자 중의 주로 남자들의 관심을 끌 것처럼 보였지만, 그또한 필연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죽은 구범모(이성민)는 그의 집 마당에 묻어버린 "유만수"가, 또한 어이없이 죽음을 맞은 "고시조(차승원)"의 시체는 왜 자신의 집에 가져와서 식구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는데도 억지로 마당에 묻으려고 전기 톱질까지 했는지도 이 역시도 극적인 필연성이 없었다.
극 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피우게 될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자신의 담배를 건네는 "유만수"의 모습은 타락의 정도가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을 보여주며, 자리를 뺏기 위해 현업의 전문가인 "최선출(박희순)"의 집에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의 마당에 묻어 처리하는 장면에서는 끊었던 술도 최대치로 마시면서 절제했던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리면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되었음을 알린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아들이 목격한 시체 유기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마당을 팠다가 그것이 그저 사과나무를 키우기 위해 돼지를 한 마리 묻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며, 그것이 남편이 사람을 죽여 자신의 일자리를 되찾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 진실을 함구하는 범죄 동업자를 선택했음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모호하게 여러 해석을 남기기 위해서 "박찬욱 감독님"이 선택한 전략은 그렇게 남편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알고 있다고 드러내지 않으며 포옹하면서 넘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정말로 묻힌 것을 파보니 돼지였을 수 있고, 남편의 살인은 그저 그의 머릿속 환상일 수도 있다는 해석의 여지도 허술한 극 전체를 변명하기라도 하듯 남긴 것처럼 보였다.
또한 "구범모"의 아내인 "이아라"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자신이 남편을 쏴서 죽인 권총을 "유만수"가 다시 가져가면서 남편의 시체도 은폐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범모"가 "고시조"와의 원한 관계 때문에 그를 죽이러 암행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경찰이 듣고 순진하게 믿게 만드는 내용도 환상을 겪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살짝 깔게 만들 수 있다.
"유만수"의 직업을 유지하고자 저지른 살인이 만약 극 중 정확한 사실이 맞다면, 이것을 합리화하는 또 하나의 전제는 약간 자폐아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지만, 첼로를 열심히 배우는 그의 딸이다.
그를 가르치던 교사로부터 이미 수준이 너무 훌륭해서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고 더 훌륭한 선생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부모가 듣는 내용은 마치, 예술계에서 천재로 평가받을 존재를 키우기 위해선 평범하고도 나이 많은 이야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는 "영포티"를 혐오하는 젊은 세대가 짜릿하게 좋아할 만한 스토리를 깔아 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에 "유만수"와 "이미리"간의 서로 끔찍하게 사랑하는 모습이 반복되어서 나오는 것은 또한 이 커플이 사랑하며 편하게 살기 위해서 희생되는 그 어떤 존재도 사실 그렇게 중요할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다. AI 시대에 직장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도 될만한 자격은 외모가 훌륭하고 금슬이 좋은 부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식, 살아남기 위해 살인도 불사할 이기심이란 말일까?
그리고 자신의 일자리를 제대로 찾아서 들어선 공장에선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거대한 종이 롤을 움직이는 것은 센서를 붙이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모드의 차량들이며, 그 종이를 자르거나 테스트하는 공정은 기계팔 등으로 대부분 이뤄지고 있어서, 사람의 필요성이 아주 작은 자동화 시스템에서 디지털 패드를 들고 여기저기를 다니고 있는 "유만수"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흐른다.
그런데, 이 작품이 뭔가 좀 더 메시지나 첨단 AI 문명에 대한 경고 등을 담고자 했다면 은근슬쩍 드러내기라도 했을 만한 어떤 불길함 같은 것은 극 내내 잘 펼쳐지지 않는다. 아니면 감독은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런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관객과 시청자가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했다고.
그런데 왜 제목이 "어쩔 수가 없다"이겠는가? 이런 연쇄살인까지 저질러서라도 살아남으려고 발악을 하는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는, 이 대책 없는 세상의 변화가 개인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약한 자를 밟고 생존하는데 온 힘을 다해서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함 아닐까?
사족이지만, 아카데미상 같은 것을 해외에서 받기를 희망하고 있는 작품이란 인상을 보는 내내 받았는데, 제지업이란 산업이 매우 후진화되어 있는 산업이라고 가정하고,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 외딴곳의 단독 주택에서 살기를 더 원하고 있다는 일종의 조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파트 밀집 주거 구조에서 살아가는 이가 이른바 중산층인 국민 중 상당수가 되는 한국에서 얼핏 생각했을 때 임원급이 아니고선, 아주 벌이가 좋을 것이다란 생각이 바로 들지는 않는 공장의 관리자가 2층 단독 양옥에서 살아가는 이가 3명이나 나오는 것을 보고선, 왠지 "기생충"의 성공에서 비롯된 미장센에 부려진 욕심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이 아닌가 싶어졌다.
커다란 개도 2마리 키우는 "유만수"의 집에는 식물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설정을 깔아서 자신의 식물원을 마당 안에 만들고, 시체 절단 작업 등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마당이 있기에 시체를 파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구범모"의 집도 멋들어진 양옥 단독이어서 마당에 죽은 그를 파묻을 수 있었고, "최선출"의 집도 그의 이혼을 불사한 자연 사랑 때문에 외진 곳의 단독 양옥이라 파묻기 좋았다.
화학공학도 전공한 엘리트로 묘사되고 있는 "유만수"가 약품을 동원해서 시체를 소멸시키지도 않고 전기톱으로 절단해서 차곡차곡 접은 시체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 것도,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서 고어물 형태의 장면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에 넣었을 것 같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블록버스터 영화 산업이 OTT사의 투자 없이는 앞으로의 존속이 어려워 보이는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감독 생활을 할 수 있는 방안은 글로벌 흥행작을 만들고자 아카데미와 칸 같은 곳에서 수상해야 한단 강박관념이 사실상 한국에서 보기 힘든 보다 유럽/미주에 맞는 주거 형태를 익숙한 풍경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시나리오와 미장센의 압박으로 작용하는 것 아닐까?
[작품에 대한 변명 및 해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유만수"는 반려견 두 마리를 포함한 가족과 집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낸다. 가장인 유만수가 "다 이루었다"라고 발언할 만큼, 그들은 더없이 행복한 하루를 만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회사에서 받은 장어를 구우며, 미국인 경영진도 장어의 효능을 안다고 얘기한다.
물질적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희망하는 거주지에서 살며, 즐기고 싶은 취미 활동을 영위하는 삶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지향하는 바이며, 한국 사회 또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유만수가 재직하던 제지공장을 인수한 미국 기업은 공정 자동화를 통한 생산 효율 향상을 명분으로 20% 인력 감원을 통보한다. 노조 설립 없이 사측에 협조적이었던 근로자 대표 측은 별다른 대안 없이 이 감원 안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근로자 측 대표로서 미국인 경영진에게 접근해 통역을 통해 감원 철회를 호소하려 했던 유만수는 끝내 묵살당한다. 그는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채 현장을 떠나는 경영진의 차량 "에스컬레이드"를 그저 망연히 응시할 뿐이다. 그 후 자신이 받았던 장어 선물이 해고 신호임을 알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오징어 게임>에서 VIP의 유흥을 위해 희생자를 양산하고 게임의 승리자로 군림했던 배우 "이병헌"이, 본 작품에서는 희생당하는 역할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역의 반전이 이 작품의 상업적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요소로 판단된다.
또한, "주주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업은 단중장기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한 대량 감원은 용이하게 이루어지며, 역사적으로 고용의 진입과 퇴출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언급되는 장면은 이러한 맥락을 드러낸다.
다만, 박찬욱 감독이 이러한 저항감을 관객에게 노출하는 이유는 사회 비판을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저항감 자체에 대한 공감과 현실 묘사가 지닌 상품성에 주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아바타>가 자연보호와 인종 차별 철폐 메시지를 강조하여 작품의 상업성을 제고한 방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작품 또한 "미국식 반자본주의 정서를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감독 특유의 화법으로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작가 조합이 AI로 인한 고용 불안을 우려하며 파업을 진행하던 시기에도 미국 제작사를 위해 창작 작업을 지속했던 감독이다. 어쩌면 영화 속 "어쩔 수 없었다"는 메시지는, 자신 또한 언젠가 대체될 수 있는 창작자로서 감독 스스로가 하는 그 같은 작업을 한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 이 작품 내의 모든 사회적 일탈자들이 이야기할 내용은 자신의 행위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라는 필연성일 수 있겠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이 필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 속의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이른바 "아집"과 "고정관념"이다.
일단 기업은 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인간의 불행으로 연결되는 것을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변화에 놓여 있는 인간은 다른 양상의 삶을 불가피한 변화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사측이든 노측이든.
그럼으로써 "어쩔 수가 없다"라는 변명이 다른 것으로 변해야 한단 메시지를 주려고 했던 것이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원작 소설인 "The Axe(1997)"의 내용은 구조조정을 당한 개인이 7명의 경쟁자를 모두 죽이고 나서 시스템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하는 모습이 나오며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긴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