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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신 Jan 31. 2023

03 육지것들의 정신 사나운 봄날


"해녀 삼촌! 여기 좀 보세요"

 친근하게 말을 거는 누군가가 있다고 치자. (아마도 육지사람일 것이다.)

"삼촌? 누게가 누게 삼촌이고?"

그리고 누군가 대꾸를 했다고 치자.

"저도 알아요,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는 거요!"

얼핏 표정이 떠오를 만큼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는 마음이 담뿍 담긴 대답이지만, 애매하다. 여기서도 삼촌은 말 그대로 친척을 부르는 말이다. '삼춘'이 남녀 가리지 않고 이웃 어른을 친근히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웃 어른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으니 그게 딱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도 있지 않은가? 


물론 삼촌과 삼춘의 차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입도 5년 차 봄날 사장님처럼 삼춘이라는 호칭이 입에 착 붙어서 무심히 나오는 육지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도빈이 할머니한테는 그 차이를 알든 모르든 입에 착 붙었든 말든 그저 눈살을 찌푸릴, 혀를 끌끌 찰, '육지것들의 정신 사나움'일뿐이다.

해녀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물질하고 기진맥진해서 나오는 사람한테 휴대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으려고 드는 육지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뿐인가, 마을 여기저기 정신 사나운 육지것들의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전문가시니까, 해녀 물질 일타 강사 좀 해주세요!"

얼마 전에도 찾아와서 너스레를 떠는 해녀학교 사무장인가 하는 이도 육지사람이라고 했다. 여기도 육지사람 저기도 육지사람. 

"육지사람 많이 와서 마을 잘 되면 조추게(좋지)"

곱단 할망(양배추 할머니)은 그렇게 말하지만 도빈이 할머니 생각은 달랐다. 도빈이 맡겨놓고, (제주)시서 장사하던 아들에게 바람 넣어 사업하자고 육지로 데려간 것도 육지사람이다. 

"철수가 바람든 거주게. 무사(왜) 육지사름 탓을 햄쪄."

곱단 할망은 그리 말했지만 육지사람과 안 어울렸으면 그런 일이 안 났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판국에 도빈이 마저 육지사람이 차린 카페를 들락거린다고 하니, 말은 못 하고 속이 안 좋았다. 뭐라고 크게 야단을 쳤다가, 지 아방처럼 육지 바람 들어 불민 어떵할꼬.    

       





"어디? 봄날?"

"어, 그 봄날!"

도빈은 양배추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봄날은 큰여에 육지사람이 낸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다. 원래 양배추, 양마리 큰고모네 집이었는데 육지사람이 세를 얻어, 몇 달 뚝딱뚝딱 고치더니 간판을 달았다. 양배추 큰고모네 안거리는 게스트하우스, 밖거리는 카페가 됐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육지것들의 정신 사나운 집’이 됐지만 도빈의 눈에는 큰여 바당의 비릿한 갯내와는 차원이 다른 집이 됐다. 육지의 냄새를 풍기는 ‘큰여의 명소’가 된 것이다. 봄날은 명소답게 주말에 북적거린다. 육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큰여 바당(바다)를 보며, 탄성을 지른다.

“어머, 저 물 색깔 좀 봐! 예술이다 예술!”

바다 색깔이 예술이라니. 도빈은 동의하기 어렵다. 호들갑을 떠는 육지사람들이 예술적으로 더 신기할 뿐. 하지만 도빈은 가끔 생각한다.

'나도 육지사람이 되면 바다가 예술로 보이게 될까?'

도빈은 그것이 약간 궁금하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기에 도빈에게 바다가 예술이 되는 계획은 무리수다.   

어쨌든 양배추는 거기 봄날에서, 할머니에게 이르지 않는 대신에 대타로 토, 일 오후 서빙 알바를 하라는 것이다.

 열 번.

 “네 번. 그 이상은 못 하지. 알잖아.”

도빈은 불쌍해 보이려 애썼다.

(양배추는 그런 거에 아주 조금 약하다.) 

그리고 해녀학교에 붙으면 토요일에 해녀학교에 가야지 거기서 알바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마조마하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추가 흔쾌히 ‘좋아’를 외쳤다. 이건 뭐지? 세 번이라고 할 걸 그랬나. 도빈은 손해 본 느낌이었다.   

“대신 내가 하라는 날 해.”

더 뭐라고 말대꾸를 하기도 전에 양배추가 덧붙였다.   

“그런데 친구야! 우리 동네에 비밀이 있겠니? 복덕개 로맨스가 얼마나 퍼졌게.”

말 끝에 메롱. 하고 혀를 내밀고 달아났다.    


복덕개 로맨스?? 복덕개 로맨스!!

 

도빈은 정신이 번쩍 났다. 양배추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도빈이 해녀학교에 가려고 하는 이유를. 그래서 처음부터 소나이(사나이)의 사랑 어쩌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으로 절대 끝날 리가 없다. 두고두고 우려먹을 것이다. 도빈은 저만치 멀어지는 마리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직접 본 건 아닐 거고? 누구지? 아, 젠장. 그날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큰여 마을에서 아무도 없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 없었다. 도빈과 도빈이 그녀라고 부르는 지유가 처음 만난 것은 마을에서 운영하는 '영등할망 밭담길' 투어가 끝나고 나서였다. 지유는 그 투어 참가자 중 하나였다. 2월 첫째 날 복덕개 포구로 들어와 15일 동안 섬에 머물다 떠난다는 영등할망을 테마로 기획된 행사였는데, 마을 향사에서 출발해 마을 안쪽 밭담길을 걸으며 마을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다. 투어가 끝나고도 감흥이 가라앉지 않았던 지유는 삼촌인 카페 봄날 사장님에게 카메라를 빌려 복덕개로 다시 향했다. 바람이 차고, 물이 들기 시작해 미끄러웠지만 지유의 감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보통 아주 상투적인 로맨스의 첫문장처럼, 지유는 철퍼덕 미끄러졌다. (사실 안 미끄러지기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마침 복덕개 위 도로를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던 도빈의 눈에 띄었다. (이날도 도빈은 할머니 스쿠터를 몰래 타고 할머니가 뽑아오라는 쪽파 심은 밭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빈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내려와, 파도에 둥둥 떠내갈 뻔한 카메라 가방을 건져왔다. "와, 다 젖어서. 진짜 너무 고맙고 미안합니다." 지유는 거의 울 것 같았다. "아, 괜찮아요. 집 가까워요."    


와, 이쁘다. 그렇다 도빈은 첫눈에 반했다. 아주 매우 상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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