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신 Jan 31. 2023

02 이제 그만 소중하고 싶은

 


바다는 쉽지 않다. 태풍이 오기 전의 구름도, 맑고 바람 없는 날의 너울성파도도, 찌끄래기 많은 파도 아래 어둡고 뿌연 물속도, 매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매일의 아침을 바다의 기운에 의지하고, 물아래 바위와 해초와 돌틈의 문어와 눈을 맞추고, 더러 큰 전복에게 손이 물려 버둥거리다 물숨 먹고 간신히 물 위로 올라와 테왁을 부둥켜안고 ''아욹허~" 저승 문턱에서 돌아온 자의 숨비소리를 뱉어 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도빈이 할머니는 용왕님이 살피고 영등할망이 뿌린 씨가 자라는 물속이 좋다. 거기서는 오로지 한 생각만 하면 된다. 물건만 하면 된다. 근심 많은 날, 가만히 있으면 어서 오라는 듯이 바닷소리가 들린다. 짝꿍 물벗들의 호~이 호~이 숨비소리가 들린다.


음력 2월 영등달이 오면 도빈이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지드림을 한다. 

쌀알을 한지에 싸 무명실 묶어 '지'를 준비한다. 

용왕님께는 '요왕지',

바다에서 죽은 어머니와 남편과 언니들 위한 '조상지', 

먼 타지로 이민을 떠난 딸네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들과 아들의 유일한 피붙이자 손주인 도빈이를 위한 '식구지', 

뇌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안녕을 위한 '몸지'. 

용왕님, 굽어살피소서! 보살피소서! 

날마다 빈다.  


도빈은 왜 자신이 시시때때로 용왕님을 찾는지 모른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제가요? 제가 그랬어요? 언제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도빈은 도망쳐 나오듯이 뛰쳐나온 교무실 복도에서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모았다.

어쨌거나 침착, 자중해야 한다. 침착~. 심호흡을 해본다. 언제나 계획을 비계획적으로 방해하는 양배추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잘,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가? 도빈은,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용왕님! 올해도 할머니 지 잘 접수하셨죠. 양춘미 여사의 세상 유일무이의 손지, 현도빈 기억하시죠? 현도빈한테서 양배추, 아니 양마리를 멀찍이 떼에 내주십시오. 제발, 그래 주십시오! '

 사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한걸음 씩 걸었다.  

“아이고야, 촘말로 이제사 용왕님도 찾암쪄.”


귀청 떨어지게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배추, 양마리다.


'아, 저 귓것(귀신) 같은 양배추!'

도빈의 썩어가는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마리는 도빈이 교무실에서 늘어놓은 해녀학교에 지원하는 이유를 읊어댄다.    

지역 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죠?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핸? 아이고야, 큰여 보말 소라가 웃을 일이라.”     

'양배추가 교무실에 있었단 말인가?'

도빈은 이제 모든 운명을 오로지 할머니의 용왕님께 맡길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야, 그냥 가라.”

도빈이 말했다.

“실프다(싫다) 친구를 두고 어떵 혼자 가니?”

"야, 너 진짜 안 꺼질래!"

도빈은 금세 평정심을 잃었고, 양마리는 특유의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으며 도빈 앞으로 다가왔다.

"아우, 진정하라. 근데 너, 할머니는 아시니?"

도빈의 급소를 찔렀다.


사실 양배추는 도빈의 오랜 친구다. 도빈이 생각하기에 너무 소중해서 이제 그만 소중하고 싶은 친구. 앞마당에서 바로 보이는 큰여 바다처럼 너무 오래 봐서 이제 그만 보고 싶은 그런 친구.

 

17년 도빈의 인생에 양마리가 없던 순간은 드물다.


다섯 살 어느 날, (제주)시에 살다가 아버지에 의해 할머니한테 짐짝처럼 맡겨진 뒤, 거의 날마다 앞마당에서 질질 짜고 있을 때 울지 말라고 불가사리 모자를 씌워주고 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을 꺼내준 것도,   
일곱 살 여름, 갯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갯강구를 뒤집으면 꼼짝 못 한다는 걸 알려준 것도,  
열세 살 여름, 큰여 포구 다이빙포인트에서 팥빙수 내기를 하다가 물 먹고 정신 노래졌을 때 도빈의 얼굴에  싸다구를 날려서 깨어나게 해 준 것도, 
열다섯 살 겨울, 도빈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차인 날, 눈물 콧물 빼면서 울고 있던 도빈을 어르고 달래서 제주시 코인 노래방에 데려가서 듀엣으로 '김밥'을 부르며 놀아 준 것도,  

열여섯 살 봄, 할머니 스쿠터를 몰래 타다가 동네 도롯가에 줄줄이 세워놓은 깻단 무더기를 다 깔아뭉개버려서 집에서 쫓겨났을 때 하룻밤 재워준 것도,
모두 다 양배추, 양마리였다. 거기까지만 들으면 양배추는 도빈의 매우 '나이스한' 친구 같다. 그래서 도빈은 억울하다. 중요한 건 다음이니까. 그러저러한 일 모두를 차곡차곡 쟁여두고 하나씩 꺼내서 놀리고, 매번 보상을 요구한 것도, 양배추였으니까.

생각해 보라, 양배추의 창고에 차곡차곡 쟁여진 일이 얼마나 많을지. 


“제발,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이렇게 빌게.

도빈은 납작 엎드렸다. 할머니가 미리 알면 곤란하다. 절대 허락 안 할 것이다. 들키면 그때  해결하면 된다. 이미 말했듯이 도빈은 다 계획이 있다.   

“공짜로?”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원하는 게 뭔데?”

도빈은 어떤 말이 떨어질까 초초하게 양마리의 입술을 쳐다봤다. 담임 때와도 다르다. 뭐든 오케이 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예감이 안 좋다.

 

    


이전 01화 01 도빈의 요즘 계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