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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신 Jan 31. 2023

04 은혜는 은혜로 사랑은 사랑으로 행패는 행패로  


다음 중 해녀가 물질하러 갈 때 절대 빠트려서는 안 되는 것은? 

1.고무옷  2.물안경  3.테왁망사리  4.호맹이  5.빗창  6.연철

당신이라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잠수복을 입어야 물속에 들어갈 테니 1번? 보여야 할 테니 2번? 물건(해산물) 잡으면 담고 작업 중에 쉬기도 해야 할 테니 3번? 성게 오분자기 문어 잡으려면 4번? 전복 따야 하니 5번? 고무옷 입었으면 부력 때문에 꼭 필요한 6번?  


누군가 평생 물질을 해온 도빈이 할머니에게 묻는다면, 대뜸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야 벗이지, 숨빌 때 벗 어시 하민 욕심 나 죽기 조추게." 

전복을 욕심부려 따다가 닻줄에 오리발이 얽혀 물숨 먹고 허우적대던 도빈이 할머니를 구한 것도, 수애기(돌고래)들 따라온 상어를 따돌려 낸 것도, 예기치 못한 파도가 들어오는 걸 먼저 알아보고 나가자고 재촉하는 것도 '벗'이었다. 

"머정 좋은 벗이 있으면 덕도 보고." 

같은 바당에서 물질을 해도, 해녀들 중에 제일 기술이 좋다는 '상군' 도빈이 할머니가 방금 물질을 하고 올라온 그 바당에서 머정(물건을 찾는 눈이 밝은) 좋은 벗, 양배추의 할머니는 더 깊은 수심까지 내려간 도빈이 할머니가 찾지 못한 전복과 소라를 잘도 찾는다. 도빈이 할머니 망사리에 나누기도 한다. 물밖에서는 뜻이 안 맞아 의가 상해도 물에서는 둘도 없는 물벗이 된다.  


가끔 도빈이 묻는다. 

"할머니는 양배추 할머니랑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좋을 때 좋고, 나쁠 때 나쁘지."

그리고 할머니는 꼭 되묻는다. 

"너는 마리허곡 사이가 좋으냐, 나쁘냐?"


     



 도빈은 터덜터덜 걸어갔다. 구멍 난 자전거 바퀴를 고쳐놓지 않은 게 좀 후회가 됐다. 옷차림이 신경 쓰여서 옷장을 뒤져 그중 때깔이 좋은 (그러나 좀 두꺼운) 남방에 청바지를 입었더니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흐른다. 봄볕도 따갑고, 바람도 세고, 마음도 복잡하고. 17세 청소년의 토요일 외출로는 여러모로 좋지 않다.   

“야, 너 무사(왜) 겨울옷을 입언? 철도 모르나.”  

쌩하고 지나가는 양배추 자전거.

해녀학교 발표 날, 봄날 대타 아르바이트하라고 불러놓고 어디 놀러라도 가는 모양이다.

‘하느님. 요왕님. 양배추 좀 잡아감쪄예.’

“천천히 걸어오라. 땀 냄새나는 소나이, 여자는 실프다게(싫다).”   

그냥 확!

도빈은 양배추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양배추가 자신에게 부린 모든 행패를 다 적어두리라 다짐했다.


은혜는 은혜로 사랑은 사랑으로 행패는 행패로.

 

도빈은 부득부득 이를 갈며 봄날로 가는 올레에 들어섰다.  

                     

봄날에는 육지사람이 많았다.

(도빈은 그냥 보면 알았다. 육지사람인지 아닌지.)  

“어, 도빈이 왔구나!”

사장님이 화들짝 반겼다. 그녀의 삼촌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터는 새롭게 보인다. 예전에는 혹시 사기꾼인가 의심했었다. 그러니까 저 지저분한 수염, 더 지저분한 긴 머리. 뿌연 안경. 도빈은 어디를 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졸업장을 본 것도 아니고 학력 위조도 판치는 세상이니까 어쩌면 그냥 ‘뻥’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데 와서, 이런 걸 할까 싶기도 했었다.

“네. 안녕하세요.”

도빈은 예의를 갖춰 인사한다. 열일곱이면 겉과 속을 다르게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    

“마리한테 어제 들었어.”

도빈은 그 말이 '양배추가 그러더니 네가 대타 알바 뛰러 왔구나!'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 예. “라고 웃은 건데. 사장님은 영 다른 말을 했다.

“해녀학교 지원했다며? 오늘 발표지?”

양배추가 여기까지 소문을 내 논 것이다.

도빈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해녀학교에 지원했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다. 도빈은 무사히 담임에게 2장의 추천서를 받았고, 접수를 시켰고, 할머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모른다고 믿고 있고), 합격자 발표는 오늘 문자로 온다. 경쟁률이 무려 15대 1. 도빈이 자신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넷이다.  1. 나만 되고 그녀는 안 된다.  2. 나는 안 되고 그녀는 된다. 3. 나와 그녀가 같이 된다 4. 나와 그녀가 같이 안 된다. 물론 도빈이 바라는 건 세 번째다. 그게 아니라면 같이 안 되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중 최악은 자기만 되는 거다. 자기가 되고도 안 다니겠다고 한다면 담임은 가만 안 둘 것이다. 그거야말로 엄청난 말썽에 해당한다. 솔직히 도빈은 담임이 진로탐색특별반을 언급할 때만 해도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자시만 된다면 도빈은 인생 최대 난제에 빠지게 된다. '진로탐색 특별반이냐, 그녀 없는 해녀학교냐?' 둘 중 무엇이 최악인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 저기 서울에서 내려온 조카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도빈은 잘됐다 싶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아, 지유? 곧 올 거야. 요즘 여기 대안학교 알아보느라 걔 바쁘다."  

'아, 그녀는 아예 여기서 학교를 다닐 생각이구나.'

도빈은 자기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조카님이 생전 안 다니던 학교를 두 군데나 다니고 싶어 하고 말이야."

사장님은 전혀 안 웃긴 유머를 하고 있다. 그래도 도빈은 하하 하고 웃었다. 

도빈이 지금까지 알아낸 것에 의하면 그녀는 올해 열아홉 살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홈스쿨링을 해왔다고 한다. 올해 연구 주제를 해녀로 잡았기에 여기로 이주한 삼촌네 집에 내려온 상태라고. 해녀학교도 그래서 들어가려고 한다고. 세상에 저렇게 이쁜 사람이 그렇게 저돌적으로 산다는 게 말이 되나. 도빈은 마음속으로 다시 빌었다. 용왕님! 그녀와 저 둘 다 붙여주서야 합니다! 꼭이요! 


어쩌면 용왕님은 그때 도빈의 말을 듣고 빙긋 웃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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