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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eell Oct 16. 2023

여보 고생했고 고마워

남편에게 쓰는 편지


제 있었던 엄마 생일 식사 후기.



가는 길 부터 총체적 난국이었다.

10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언니네는 세차장에 들렀다 오는 통에 늦게 출발했고,

차를 곧 구매할 예정인 우리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게 됐다.


시아버님의 차를 탔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남편은

좌석에 등을 기댄 듯 안 기댄 듯 애쓰는 표정과 모션이 역력했다.

나 역시도 아버님의 차를 타면 마찬가지이므로 굳이 미안해하지는 않았다.

편치 않은 것은 당연하므로.




출발한지 중간 쯔음 됐을까.

둘째고모한테 전화가 걸려와서 엄마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가족끼리의 외식으로 인해 나와있다고 말했으나,

셋째고모가 일요일밖에 시간이 안되니 오늘 만나러 가겠다는 등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몇십년동안 좀 이런 밀어붙이는

분위기가 이해되지가 않는다...... 시누이가 여섯명인 엄마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그런건가....... 좀전에 통화를 해보니

어제 저녁은 참 많이 체력적으로 힘들고 피곤했다고 들었다.)




굳이 눈치없게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온다고 하는 상황이 연출되어

결국 마지못해 엄마는  우리와는 점심을 먹고, 고모 둘과 작은엄마, 

작은엄마의 큰딸인 사촌동생과 작은엄마의 쌍둥이 손주와는 동네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기서 바깥에서 두 끼를 먹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생각해보니

우리 이서방의 자유시간과 나의 조금 남은 기운이 마저 소진됨을 느껴서

최대한 참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플랜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가 고른 메뉴와 맛집인 장어구이집에 도착을 했다.

외관이 신식으로 바뀌어서 찾는 데부터 헤맸으며, 때부터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눈치를 준 것이 아니지만 뭐라도 기운을 뻇는 일이 없었으면 했어서 

간중간 살피기 시작했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것 같다.)


근데 아뿔싸. 우리 일행에는 다섯 살 어린이가 있었다.

조카는 언니 옆에 앉혀놓고 얘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할 것 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평소 나를 잘 따르는 편인 조카가 유독 내 옆자리에서

자리를 바꾸지 않고 앉아서 중간에서 다소 난처한 상황이 연출됐다.




조카를 백일부터 두 돌전까지 일을 쉴 때, 가게를 운영중인 부모님이

풀타임으로 봐줄 수가 없어서 내가 봤던 적이 있어서일까. 유독 가깝고,

가깝게 살아서 자주 볼 것 같지만, 몇 주 한 달 만에 봐도 나랑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좋아해주는 조카가 고맙다.


기본으로 제공된 미역국에 미역을 호호불어 식혀서 먹였고, 밥을 말아서

조금 먹이다가 혼자 먹게 했다. 갑자기 혼자 삐지고, 막 웃고 하는 통에

플라스틱 물컵을 쏟았는데 어린이의 옆자리 비서실장으로서 굉장히 미안했다.


조카가 밥 한 그릇을 뚝딱 다 먹고 장어를 먹어 보려고 하니,

다른 식구들이 얼추 다 먹은 상태에서 초벌구이 장어가 남아 있어서,

혼자 먹기도 애매했다. 그나마 남편이 서너 점 챙겨준 것이라도 먹어서 다행이라 생각은 했다.




중간중간 조카를 돌보느라 남편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빈 반찬을 채우고 장인, 장모님, 처형, 형님 눈치도 보고,

손윗사람들의 술잔도 채우고, 눈치도 보는 것을 알면서도

전부 커트를 해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평소에 세세하고 살뜰하게 잘하자가 아닌 만나 뵈면 그 때 충실하고 잘하자가

우리 부부가 각오한 것이므로, 선의의 거짓말을 탑재하기로 했다.




엄마 생일 선물에 여러 가지를 사드려봤지만, 백화점 화장품을 사드린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서, 평소 바르는 색상을 알고 있던 차에 좋은 브랜드의

립밤을 이틀전에 준비해놨었다.


분명히 또 내가 샀다고 하면 "쓸데없는 거 샀네. 이런거 안줘도 되는데"를 

장시간 습관적으로 시전할 엄마이므로, 이서방 방패를 사용하기로 애초에

결심이 돼있었다.




잠시 아빠와 언니네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마에게 조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미 풀어보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려는 엄마에게 바로 말했다.

(남편에게는 미리 윙크로 싸인을 전달했다.)


"엄마 이거 이서방이 준비한 선물이야. 장모님 생일이라고 사위가 

신중하게 골라본 선물이라네~ 나도 한번도 화장품 선물 받아본 적 없는데~"

(화장품 선물을 연애때부터 못 받아본 것은 사실이므로 차용했다.

물론 그 사실에 대한 아쉬움은 진정없다. 화장을 잘 안하기 때문에

기본 화장품만 좋은 것으로 스스로가 구비하는 편이다.)




예상대로 푸념과 한탄의 리액션이 이어졌지만, 나는 결혼 전과는 다르게

그 말을 좀 절삭해드렸다. "엄마 풀어보기도 전에 인상부터 쓰지 말고

좀 열어봐. 어차피 취향이나 엄마 스타일은 내가 반영한 거니까"


다행히도 결과는 안사드렸으면 큰일날 수 있었다로 귀결됐다.

"사위 덕에 브랜드 립밤을 다 발라보네 호호호호. 립스틱은 몇 개 있는데

안 그래도 좀 더 가벼운 걸로 뭘 발라야되나 고민을 하긴했는데"




남편에게 엄지를 치켜올렸고, 남편 역시도 나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선의의 거짓말을 용납해준 것도, 투덜투덜옵션이 기본인 장모님을

잘 맞춰드리려고 애쓰는 그 모습도 너무 고마웠다.


원래 우리집에 오랜만에 가서 과일과 차를 마시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온김에 신발을 사고 싶다고 하는 통에

김포 아울렛에 들렀다 가자고 해서 잠시 난처했지만,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럼 들렀다 가는 것으로 하고 가고 있던 길이었다.




새벽에 출근하는 아빠가 얼마 못 주무시고 나오셔서

그냥 집에 가자고 하신 통에, 마음이 상한 언니와 지친 아빠 사이에서

굉장히 난감했다. 그러나 나는 결론을 내려서 상황을 정리했다.


"아빠 졸리신데 혼자 가시게 할 순 없으니까 우리가 같이 가고,

쇼핑을 하고 싶던 엄마는 언니네랑 같이 오면 될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아빠 집으로 모셔다드리고 갈게"




그렇게 나는 아빠와 남편(이서방)을 모두 구하고, 나도 구했다.

친정에 무사히 주차를 하고, 정리할 짐들도 집에 모두 정리해드리고

나오니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진심으로 아빠를 집에 혼자 오시게 할 수는 없었다.




집에 걸어오면서 남편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고,

곤란하게 하는 일은 최대한 없게 내가 더 잘 대처하겠다고 했다.


수고한 남편에게는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치킨을 하사했고,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안타깝게도 어제의 방문은 한 주 미뤄져서 다음주 주말에

엄마네와 언니네가 우리집에 식사를 하러 오기로 했다.




솥밥과 과일, 차를 준비해 볼 예정인데, 남편에게 너무

우리 식구들에게 본인을 너무 낮추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필요한게 있고, 갖다 드릴게 있으면, 할 말이 있으면  

분위기 보고 적당한 선에서 할거니까."




감기기운있는 상태로 출근했는데 많이 피곤하고 더 힘들거라

저녁에는 따뜻한 무국과 밥을 챙겨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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