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오래 전, 책을 읽을 때면 엄마는 내게 줄곧, ‘학생 때 아니면 책 읽을 시간 많지 않을 걸.’ 이라고 지나가는 말을 하곤 했다. 언뜻 듣기에도 열심히 읽으라는 무언의 압박이라기 보다는, 왠지 자신에게 남는 아쉬움을 아들인 내가 반복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직접 샀던 오래된 책들은 지금도 집에 있다. 집에 책이 많은 이유는 엄마가 책을 좋아했고, 간직하려 했고, 나도 책에 돈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아 심심할 때면 서점에 가 책을 사오기 때문이다.
입대하는 날 엄마가 사놓았던 책 중 한권을 챙겨갔다. 훈련소에서의 일과는 앉아서 대기하는 시간이 꽤 많았고 그때 난 줄곧 독서를 하였다. 누군가 사람은 스물다섯 이전에 그 자신의 경향과 사고방식이 정해진다고 했다. 그 뒤로는 바뀐다기 보다는 참는 것이라고 했던가? 저 말이 무조건 맞는 건 아니겠지만, 스물넷에 입대한 나를 돌이켜보면 참 다행이었구나 하게 된다.
책을 좋아한다거나 재밌다거나 하는 건 이전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이었지만, 뭐랄까 확실히 오랜 시간을 앉아서 꾸준히 읽는 타입은 아니었다. 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는 게 그리 일상적이라거나 습관적이진 않았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지루하거나 할 게 없을 때 '서점이나 갈까, 책이나 읽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게 습관이 되고 일상으로 자리잡은 건, 스물네살 무렵 군대에서였다. 좀 늦은 나이에 입대를 했는데, 그래서인지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헛되이 보내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하자는 욕심이랄까. 이때 2년간의 군생활은 내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비단 책을 읽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제한된 환경이 오히려 나에게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아마 좀 개인주의적인 면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보다 여유를 가지고 생활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마 그때는 줄곧 초조했고 불안했었나보다. 그래도 그 초조와 불안이 내 생활의 동력이되었구나 생각하면, 역시 무엇이든 장단이 있다고 느껴진다.
지금도 언제 가장 책이 재밌었냐고 묻는다면, 군대에서 책을 읽었을 때라고 말할 거 같다. 아무래도 사회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집중하게 된다. 원하는 책을 바로 구할 수 없기에 책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고, 병영도서관에서 골라 읽는 재미도 있었다. 아무래도 사회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만 편식하게 되지만, 거기에서는 편식할 거리가 없다보니 그냥 주어진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이게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의도치 않게 분야의 범주가 넓어졌다고나 할까. 물론 애초에 재미가 없었다면 읽지도 못했을테지만.
하긴 그러고보면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물론 만화책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겠지만, 꽤 유익한 만화책들도 많고, 친구집에 놀러가서도 거기 있는 책들을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가끔 엄마랑 예전 이야기를 할때면, 그때 내가 친구 어머니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좋았는데 그 이유가 내가 책을 열심히 읽어서라나? 전혀 상상도 못한 이유였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에 학교 도서관을 자주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책도 좋았지만, 책 읽는 사람이 왠지 멋있어보였던 것 같다. 아이들의 눈은 꽤 예리하다. 멋지고 좋은 걸 금방 파악한다.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 멋있는 건 모방하려는 습성이 있다. 혹시 책 읽는 사람 = 멋있는 사람 , 나 = 멋있는 사람의 공식을 만족하려고 책을 읽었던 건가...
별로 친하지 않고, 대화도 제대로 나눈 적이 별로 없는 같은 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사실 그리 기억에 남던 아이는 아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단정한 무채색 옷차림과 무테 안경, 차분한 성격은 한창 에너지 넘칠 시기의 초등학생이 주의를 기울일만한 요소들은 아니다. 그래서 같이 놀았다거나 싸웠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도서관에 가면 그 아이가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책을 넘기는 그 애의 옆모습이 참 이뻤던 것 같다. 아무래도 방학에는 도서관에 같은 반 친구들은 거의 없기도 하고 대부분 모르는 사람밖에 없는데, 그 지루한 공간에 아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는 건 나도 모르게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으려고 가기보다는 혹시 그 애를 볼 수 있을까 하고 방학에 늦잠도 자지 않고 학교를 갔다.
사실 지금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스스로 자랑스럽다거나, 멋졌다거나 하는 기억들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창피하고, 한심한 그런 일들이 대부분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저때 도서관에서의 기억은 나를 웃음짓게 하는 소중한 연료이다.
내가 열한살일적 보았던 그 아이의 책 읽는 모습은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난다.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