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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뜰살뜰 구구샘 Oct 14. 2024

선생이면서, 자퇴생입니다.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결국 자퇴했다. 5학기 중 두 학기를 남기고 그만뒀다. 이때까지 퍼부은 학비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원은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나는 대학원을 '학원'이라고 생각했다. 거기 가면 다양한 상담 스킬을 가르쳐줄 줄 알았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비기를 알려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년 반 동안 돈과 시간을 퍼부어서 얻는 건 논문 한 권이라는 게 아닌가? 그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닌 걸요.


나는 고고한 학자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필드에서 진흙 묻히며 뒹구는 스타일이다. 현실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 학문을 좋아한다. 하지만 대학원은 큰 학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의 근원에 가까웠다. 덕분에 당장 교실에 써먹을 수 있는 팁을 배우지 못했다. 대신 SPSS 통계 프로그램만 죽어라 만졌다. 이놈의 엑셀 같은 걸 우리 반 학생들 상담할 때 어떻게 써먹지?


나에게 대학원은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 학사든 석사든 박사든 월급도 똑같다. 교감 승진 점수 때문에 대학원을 가는 일부 선배님들도 계신다. 하지만 나는 그쪽 루트도 아니다. 난 진짜 순수하게 학생 상담이 궁금해서 대학원에 갔다. 그러니 연구니 논문이니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있나.


결국 대학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 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만났다. 이과 박사님이 문과 감성 제목을 뽑아내다니? 네이티브 문돌이로서 밥그릇에 위기감을 느꼈다.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박사학위를 딴다는 건, 운전면허를 따는 것과 비슷해요. 면허 따면 그때부터 연구 시작인 거죠."


차를 몰기 위해선 운전면허가 필요하다. 연구도 마찬가지란다. 학자로서 제대로 연구하고 싶으면 면허가 있어야 한단다. 그게 석사학위고 박사학위란다. 오 마이 갓! 학위랑 대학원이 그런 의미였어요?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단다. 하긴, 자기 연구 결과를 일일이 말로 설명하면 성대결절 각이다. 그래서 글로 남긴단다. 그게 바로 논문이란다. 자동차가 중앙선을 넘으면 안 되는 것처럼 논문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단다. 한글 모르는 외국인이 봐도 말이 통해야 한단다. 그래서 표와 그래프 같은 통계로 정리한단다.


아! 그래서 지도교수님께서 통계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하셨구나. SPSS인지 뭔지 이가 갈렸는데, 이런 데 쓰는 거였구나. 인용한 책 적는 순서가 그래서 필요한 거구나! 이걸 이제야 알아버렸네.


이제야 오해가 풀렸다. 대학원은 연구하러 가는 곳이었다. 그것도 전 세계 사람들이랑 세계 공용어로 말이다. 나처럼 길바닥에서 바로 써먹을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나에겐 대학원보다 백화점 문화센터가 더 어울렸다.



이 책을 쓴 심채경 작가는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님은 면허증을 받고서 고속도로, 아니 은하수를 질주했다. 토성 둘레를 도는 타이탄에 놀러 갔다가, 지금도 지구와 끝없이 멀어지고 있는 보이저 탐사선도 몰았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와 천체 망원경의 렌즈 뚜껑을 닫으셨다. 덕분에 나도 우주여행 제대로 했다.


박사님! 대학원이 어떤 곳인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 자퇴의 비밀이 풀렸어요. 혹시 저희 반 학생이 나중에 커서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박사님의 책을 추천할게요.


그럼 박사님, 안전 운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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