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스 고딘, <린치 핀>
나는 해군 보급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쿠팡맨'의 역할을 맡았었다. 창고에서 물건을 싣고 여기저기 배달해 주는 쿠팡맨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공간은 창고였다. 물론 요즘처럼 AI 로봇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마트창고는 아니었다. 녀석은 일제 강점기에 지었을 것 같은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일할 때 난 햇볕이 정말 싫었다. 해님이 창고 안에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눈에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걸 다 들이키고 있다고?
그래서 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알아서 바닥 물청소를 했다. 빈 팔레트는 크기와 종류별로 차곡차곡 모았다. 비닐은 비닐 대로, 노끈은 노끈대로 분류했다. 간부들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쓰레기를 리어카에 모아 버렸다. 그걸 매일 했다.
그렇게 2년을 하고 전역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귀에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 녀석 전역하니까 너무 아쉽더라. 재입대해주면 좋겠네."
나와 함께 근무하던 후임 녀석이 전해준 말이었다. 간부들이 나를 애타게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웃긴 에피소드도 있었단다.
"요새 창고에 쓰레기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구 수병 어디 있어!"
"구 수병 전역했는데 말입니다..."
참고로 해군은 이병이든 병장이든 다 '수병'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내가 전역하자 창고가 쓰레기장으로 바뀌었고, 더러움을 참다 참다 못 참은 간부가 나를 찾았단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전역해 버렸는데 말이다.
아무튼 '재입대 권유 썰'은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장 큰 건 '뿌듯함'이었다. 내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전역하고도 최대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너무 두리뭉실하지 않나? 좀 짧고 쌈박하게 표현할 순 없나?
1. '대체 불가능한 사람'
2. '퇴사하면 아쉬운 사람'
3. 'one of them이 아니라 only one'
너무 길다. 한 낱말로 이걸 설명할 순 없을까? 그러다 이 책, <린치핀>을 만났다.
[린치핀, Linchpin]
-자동차나 마차 등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고정하는 핀
-(조직·계획 등의) 핵심이 되는 인물[것]
이미 이걸 표현하는 낱말이 있단다. 그게 바로 '린치핀'이었다. 나도 이 책, <린치핀>을 읽으며 처음으로 알았다. 린치핀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마차라도 달릴 수 없단다. 고작 조그만 부품 하나 때문에 거대한 기계를 돌릴 수 없는 거다. 그걸 인간 세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나?
린치핀은 대체 불가능하단다. 린치핀이 퇴사하면 타격이 크단다. 린치핀은 Only one이란다. 저자인 세스 고딘은 이렇게 말했다. 이왕 살 거면 멋지게 린치핀이 되어 보라고. 그저 그런 부품이 아니라, 없으면 절대 안 되는 '핵심 부품'이 되라고 말이다.
나도 린치핀으로 살아보려 노력했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생겼다. 그건 바로 '호구'되기 십상이라는 거다. 린치핀은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한다. 그럼 주위에 무임승차자들이 많아진다. 내 군생활만 봐도 알 수 있다. 창고 청소는 거의 나 혼자서 다 했다.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얼핏 보면 시간과 에너지를 빨아 먹히며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호구만 된 건 아니다. 개중에는 내 진가를 인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군대 시절 4박 5일 파주 영어마을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내 청소력(?)을 인정해 준 간부들 덕분에 혜택을 받은 것이다. 전역 후 마트 알바할 때도 마찬가지다. '너 같이 착실한 알바는 처음 본다'며 알바 끝날 때 10만 원 상당의 오예스, 빠다코코넛, 전복을 선물 받았다.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대신 내가 고생해서 일을 했더니 어쨌든 저쨌든 다 돌아오더라. 그리고 그런 사소함이 쌓여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가 되더라.
"그 녀석 군생활 내내 애만 먹이더니, 드디어 전역하는구나! 다시는 만나지 말자!"
vs
"자네 전역하니 창고가 엉망이 되었어.. 재입대해주면 안 되겠니?"
난 이왕이면 뒷말을 듣고 싶다.
그러니 재입대해도 창고 청소 열심히 할게요!
사진: Unsplash의Library of Con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