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들>
'무사히'
좋은 건 줄 알았습니다. 다행인 줄 알았습니다. 사전을 봐도 그랬습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랍니다. 연관어도 평안이랍니다.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뀝니다. 무사(無事)는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랍니다.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으면 무사하답니다. 하던 대로만 하면 아무 탈이 없답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으면 잊혀진답니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의자>로 유명한 정신분석의 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니 뭔가 진짜 그런 것 같습니다. 잊혀짐은 곧 죽음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무의식에서는 말이죠.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너, 잊혀지고 싶니?'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잊혀지고 싶지 않습니다. 기억되고 싶습니다. 제 본체든, 브런치 하는 놈이든, 블로그나 인스타 하는 캐릭터든 다 똑같습니다. 녀석들은 다 기억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또 손가락을 놀립니다. 뭔가를 계속 생산하고 있습니다. '저 여기 있어요!' 하는 것처럼요. 아, 물론 악명 높은 걸로 기억되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꾸준히 떠들다 보면 반응이 옵니다. 댓글이든, 전화든, 톡이든 간에 뭔가 옵니다. 아내도 리액션을 해주고, 가족도 피드백을 줍니다. 현실 지인도, 블로그 친구분들도 응답해 주십니다. 가장 열성적인 녀석은 바로 제 자신입니다. 글 하나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자기 혼자 신났습니다. 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닙니다. 부정적인 피드백도 동반됩니다. 작년만 해도 굵직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근거 없는 악플도 꽤 받았고, 다각적으로 들어오는 압박도 있었죠.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초기화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두 손 들고 백기투항하고 싶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저를 아껴주는 지인이 그러더라고요, "참호 안에서 포탄 맞을래, 아니면 뛰어나가 볼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 거 아냐?" 그 말 듣고 참호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진 죽지 않았고요.
책을 읽은 이후 저에게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이번 일도 골치 아프지?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걸? 그런데 너, 잊혀지고 싶어? 그런 거 아니면 그럼 그냥 즐겨. 이번 것도 유사히 잘 지나갈 거야.'
저의 일도,
여러분의 일도
모두 유사히 잘 지나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