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입니다. 1학년 담임에 배정되었습니다. 처음으로 10대가 아닌 친구들을 맡았습니다. 발령 이후로 내내 고학년만 책임졌거든요.
초등학교의 3월은 금세 지나갑니다. 1학년 담임에겐 더 빨리요. 입학식부터 학생 및 보호자 상담, 교육과정 설명회까지 풀코스로 진행되죠. 물론 저도 그 파도에 몸을 실었습니다. 정신 차려 보니 장범준의 벚꽃엔딩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아침, 한 어머니께서 교실 뒷문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교실까지 찾아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보통은 신발장에서 빠빠이 합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하여 뒷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안녕하세요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네 어머니. 무슨 일이실까요?"
"저희 아이 칫솔을 사물함에 넣으라고 하셨다면서요?"
순간 등에서 뭐가 흘러내렸습니다. 여름은 아니었으니 식은땀이었겠죠. 어머님 표정, 몸짓, 말투를 종합해 보면 화나신 게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사물함에 칫솔 넣으면 안 되나요?
"아... 네... 어머니... 칫솔을 사물함에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굽은 등, 작은 목소리, 떨리는 바이브레이션 삼박자의 예를 갖추어 조심스레 답변드렸습니다. 그리고 3초간의 정적이 있었죠.
"...선생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선 매번 일광소독을 실시했어요. 저렇게 사물함에 두면 세균이 번식하지 않을까요?"
뜨아, 듣고 보니 너무나도 타당한 말씀이었습니다. 문(송)과출신이지만, 짧은 이과적 지식으로도 그 역학을 알겠더라고요. 바로 사과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죠. 원하는 학생은 사물함 말고 창가에 보관해도 된다고요.(아, 참고로 그 어머니께서는 학기 내내 협조와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학생도 완전 멋지고 예뻤고요!)
구질구질하지만 제 나름의 변명을 해 보겠습니다. 고학년 담임을 맡았을 땐 한 번도 칫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초임 때부터 학생들이 칫솔을 다 사물함에 넣더라고요. 사물함 문짝 안쪽에 보면 꽂아 놓을 홈이 있거든요. 거기 꽂든지 컵에 꽂든지 알아서 했죠. 저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살았고요.
1학년 담임을 맡아서도 똑같이 했습니다. 입학식날 준비물을 다 사물함에 넣으라고 했거든요. 그중엔 당연히 칫솔과 치약도 있었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죠. 하지만 그날의 경험이 원효대사의 해골물이었는지, 제 칫솔마저도 사물함에서 꺼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살포시 놓아두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들 사이에서 '담임이 우리 애 싫어한다.', '남자 담임이 맨날 화나 있다'라는 소문이 돈다는 겁니다. 소식을 전해주신 분은 어머니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맡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느끼셨으면 팩트인 겁니다. 이거 뭔가 조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저 어떻게 해야 해요? 도와주세요 엉엉!
어머니와 제가 긴 통화 끝에 도출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첫째, 어머니들이 공립의 맛을 처음 봤다.
둘째, 남자 담임도 처음이다.
셋째, 심지어 그 남자가 총각이다.
다행히도 그 리더 어머님께서는 학부모 경력이 높으셨습니다. 이번에 입학시킨 자녀가 셋째였거든요. 베테랑이었습니다. 바로 실태파악을 해 주셨죠.
대부분의 1학년 학부보님들은 공립의 맛을 처음 본대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도 국공립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공공기관에 아이를 보내는 것은 처음인 경우가 많다나요. 그래서 괴리감을 느낀대요. 어머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뜨뜻한 온탕에서 몸 지지다가 갑자기 시베리아 호수에 얼음 깨고 들어가는 느낌이라나요?
들어 보니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저도 나랏녹을 먹지만, 공무원 특유의 그 차가움을 알거든요. 주민센터에 전입신고한 경험이 많지만, 한 번도 '어서 오세요~! 저희 동에 전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사랑으로 모시겠습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권 만들러 간 시청에서도, 월세 세액공제 경정청구하러 방문한 세무서에서도 맥락은 같았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머님들 입장에서 남자 담임은 처음일 가능성이 높대요. 7세까지 만나는 담임은 대부분 여자인데, 인생 처음으로 남자 담임을 만났으니 신인류를 본 거죠.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무리 남자가 콧소리 내고 도레미파'솔'톤으로 얘기해도 근본적인 차이는 채울 수 없대요. 그냥 어깨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부터가 다르다나요?
게다가 그 담임이 총각이었으니, 완벽한 3박자를 갖추었답니다. 결혼, 출산, 육아를 전혀 모르는 담임이 8살 자녀를 맡는다? 염려를 하시는 게 당연했습니다. 우리 애 바지에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저 총각 남교사가 잘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물론 1년 내내 고무장갑 끼고 빨래까지 사뿐하게 클리어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그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소중한 팁 덕분에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 뒤 진행되었던 보호자 초청 공개수업에서 최대한 텐션을 높였거든요. 수업을 마치고 한 분 한 분 인사도 드렸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톤을 베이스로 함박웃음 한 스푼 넣고, 마지막으로 아이 칭찬 한 꼬집까지. 정성을 다했습니다. 보호자분들도 흡족한 마음으로 귀가하신 것 같았죠.
그로부터 몇 년 뒤, 그 총각 교사는 장가도 갔습니다. 애도 낳았죠. 그 애가 4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림장 하나를 받게 됩니다.
'00어린이집 OT 참석 안내'
세상에, 제가 드디어 학부모의 자격으로 OT를 볼 수 있다니! 두근거렸습니다. 10년 동안 교육과정 설명회 준비는 해봤어도, 초대받은 적은 적은 없었거든요. 드디어 어린이집의 따뜻함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 시간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따뜻하길래, 공립 초등학교 총각 남교사가 시베리아 얼음탕인 걸까요?
약속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입장합니다. 어라? 일단 입구부터 뭔가 다릅니다. 보따리 하나를 주시네요! 조심스레 안을 열어 봅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각종 간식이 들어 있습니다. 보호자를 위한 떡도 들어 있네요. 그리고 풀칼라로 인쇄된 연간 교육자료가 빼꼼히 고개를 내밉니다. 말 그대로 선물 보따리입니다.
10년 차 저경력 교사지만, 제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이 정도 꾸러미를 제공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보통 입구에 전기 물 끓이기 놓고 커피와 차, 그리고 귤 정도를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꾸러미 비슷한 것이 있긴 한데, 그건 체육관 더럽히지 말라고 드리는 신발 덮개입니다. 보통 하늘색으로 생겼는데요, 착용한 신발에 그걸 덧씌우고 강당으로 입장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보따리처럼 생기긴 했네요.
암튼, 다시 어린이집 OT에 집중해 봅니다. 원장님의 개회사가 있었습니다. 짧고 굵었습니다. 다음으로 앞에 계신 선생님들께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헉, 아이돌 소개인가요? '귀엽고 깜찍하게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교육해 줄 저는 장미선생님이예욥!'대충 이런 느낌이었습니다.(제 귀에 필터링되어 들어왔기 때문에 원본과 다를 수 있음)
그리고는 진행하시는 선생님께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세상에!) 또 각종 퀴즈를 풀며, 상품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물 포장지엔 뽀로로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는데요, 제 딸도 그거 얻어 달라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앞에 나가서 춤췄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흥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후끈후끈합니다.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선생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보호자들 앞에서, 그것도 본인보다 더 어린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귀염버전 자기소개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당장 저에게 올해 교육과정 설명회 때 '구구샘, 무대 위에 올라가서 귀엽고 깜찍하게 춤 한 번 춰 보겠나?'라는 미션이 하달된다면 바로 병가 각
선생님들의 노련한 진행 덕에 1시간이 순삭되었습니다. 정신 차려 보니 제 손에 풍선과 선물이 한가득 들려져 있더군요. 어린이집에서 1년 동안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지도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노래-(설명)-춤-(설명-선물-(설명)-퀴즈-(설명)의 시퀀스는 유튜브 쇼츠보다 더 중독적이었습니다. 1타 강사가 커리큘럼을 꽂아주는 느낌이었죠.
이제는 알겠습니다.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때 그 1학년 보호자님들의 마음을요. 그전까진 동감이었다면, 이제부턴 공감입니다. 시베리아 정도론 부족하고, 북극이나 남극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의 온도차였을 것 같아요.
지금 그분들은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되셨겠네요. 보호자님들! 저 그때 화나있던 거 아니에요 엉엉.. 학년 초 업무에 치여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혹시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그땐 텐션 높여 볼게요!
전국에 계신 1학년 학생들, 보호자님들,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파이팅입니다!
사진: Unsplash의Daiga Ella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