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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뜰살뜰 구구샘 May 17. 2023

교사, 명함이 생기다

10년 차 교사인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 신규교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명함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불편한 적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영어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명함은 영어로 비즈니스 카드입니다. 이름부터 사업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선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통 회사원들은 첫 만남에 명함을 교환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명함을 주고받는 예절도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드려야 하고, 받은 뒤 바로 집어넣지 않아야 하며, 구기거나 훼손하는 것도 금지입니다.


그럼 교사는 왜 명함이 없을까요? 사업을 하지 않아서일까요? 글쎄요, 저희도 나름 서비스업 종사자입니다. 교육이라는 상품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죠. 동종 업계의 다른 분들은 대부분 명함이 있습니다. 학습지 선생님도, 학원 원장님도, 방과 후 교실 강사님도 모두 명함을 건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저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호주머니에 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희 반 교실에 강사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세계 시민 교육을 위해서였죠. 첫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환기를 위한 대화 몇 마디도 오갔습니다. 그리고는 강사님께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셨습니다. 명함을 꺼내며 자기소개를 해주셨습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일단 두 손으로 건네받았습니다. 3초 이상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죠. 소중히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멋쩍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 저는 교사라서 명함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한참 뒤에 떠올랐습니다. 제 이름조차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분께 저는 그냥 몇 학년 몇 반 담임일 뿐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문득, 명함의 필요성이 궁금해졌습니다. 이거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인가요? 회사 다니는 친동생에게 전화했습니다. 동생아, 이거 없으면 불편하니?


동생은 명함이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회사에서도 그걸 인정하기 때문에, 연 400장까지는 무료로 만들어 준다고 했죠. 언제 주로 사용하냐고 물었더니, 다른 부처 사람을 만날 때나, 처음 만나는 거래처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용도로 쓴답니다. 이걸 교환해야 나중에 편하다나요? 이메일 주소, 사무실 전화번호, 직책과 이름이 한 번에 정리되어 있으니 좋답니다. 업무 협력을 할 때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대요.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답니다. 명함 교환 다 해놓고, 나중에 다시 이메일 주소 물어보면 어색하다나요.


남들 다 있는 명함, 도대체 저는 왜 없을까요?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40년 근무하신 선배 선생님도 명함 없습니다. 저보다 후배 선생님도 없고요.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세일즈하지 않아도 돼서 그럴까요? 가만히 있어도 매년 고객님들이 배정되기 때문일까요? 저도 나름대로 교육 서비스를 판매하는 사람인데, 남은 인생을 명함 없이 살아도 되는 걸까요?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도 명함이라는 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름을 찾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처럼요. 그렇다고 인쇄소로 뛰어간 건 아닙니다. 사비로 100장 만들어 봤자 드릴 분도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갔냐고요? 제가 선택한 것은 바로 블로그입니다.


4년 전부터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이름 앞에 붙는 직함이 늘어났습니다. 원래는 교사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강사, 신문 칼럼 기고자, 작가 같은 게 더 붙었죠.


“안녕하세요, 혹시 ○○ 초등학교 선생님 맞나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국교육신문 기자님께서 저에게 전화로 연락한 날이요. 아내와 느긋하게 밥을 먹던 중이었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죠. 보이스피싱인가 싶어 받지 않으려다가, 홀린 듯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알고 보니 신문사 기자님이셨죠.


이번에 교사에게 유용한 경제를 주제로 칼럼 연재를 기획하고 있는데, 저에게 글을 써 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습니다. 세상에,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순식간에 신문에 칼럼 연재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심지어 제 글이 열두 번이나 올라간대요!


기자님께서는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셨을까요? 그건 제가 그 신문을 매주 받아봤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에 제 정보가 있었죠. 그중에는 제 아이디도 있었는데, 마침 그게 운영하던 블로그 도메인과 일치했습니다. 기자님께선 이걸 보시고 저에게 전화를 주셨던 겁니다. 그렇게 저는 칼럼 기고자라는 명함이 생겼습니다.



사진: Unsplash의Giorgio Trovato




위 글은 <선생님 블로그 해요?> 책의 일부분입니다.

감사하게도 2023년 경남교육청 인문학도서 출간지원사업으로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비매품)

혹시 실물 책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rrrr99ss/22335133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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