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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10년 차, 3월을 바꿔 보다

마이클 모부신, <운과 실력의 성공방정식>

by 알뜰살뜰 구구샘

학교의 봄은 정말 바쁩니다. 2월부터 정신없죠. 인사이동, 학급 및 업무배정, 학생맞이 준비, 교육과정 세팅 등 모든 미션이 굵직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핑계만 댈 순 없었습니다. 10년 차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담임만 내리 열 번입니다. 이 정도면 초보 딱지를 떼야합니다.


여태까진 의식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겼습니다. 과제가 주어지면 그제야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그게 안 통합니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찍 퇴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하다 중간에 나오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저도 총각 땐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애 낳아 보니 얘기가 달라지더라고요. 제가 일찍 퇴근한다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총량은 똑같았죠. 아이가 잠든 밤시간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총각 때처럼 했다간 분명히 빵꾸납니다.


하지만 아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가요? 본인 재우고 일하려고 하면 귀신 같이 알아챕니다. 새벽 기상은 또 어떤가요? 미라클모닝이 왜 미라클이겠어요. 기적이니까 미라클이죠. 이쪽이든 저쪽이든 쉬운 건 없습니다.


시간 쪼개기는 너무 힘듭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서 꾀를 좀 부려봤습니다. 업무 효율화를 시도했죠. 여태까지는 학기 초 준비를 주먹구구식으로 했습니다. 이걸 바꿔 보기로 한 겁니다. 그게 뭐냐고요? 여러분도 다 들어보셨을 거예요.


'체크리스트'


황당하시겠지만, 앞선 9년 동안 체크리스트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일했어요. 대충 이런 식이였죠.


[상황1_학생 번호 설정]

"학생 순서 확인하세요. 나이스 작업 끝났습니다."

"어? 부장님, 남학생이 1번부터 시작인가요?"

"네. 그게 왜요?"

"예전 학교에서는 여학생이 1번이었거든요."

"우리 학교도 작년에는 그랬어요. 올해는 남학생이 1번부터예요."

(...사물함에 번호랑 이름 다 붙였는데... 다시 해야 하네...)


[상황2_물려받은 컴퓨터]

"구구샘, 파일 하나 보냈어요. 엑셀 파일에 데이터 넣어서 보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엑셀 파일을 확인한다. 정품 인증을 하란다. 정보부장님께 여쭤 본다. 유지보수 업체 기사님은 어제 왔다 가셨단다. 일주일 기다려야 한단다.)

"구구샘, 파일 언제 보내줄 거예요?"

"죄송합니다. 금방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결국 옆반 선생님 컴퓨터를 빌려서 파일을 완성한다.)


[상황3_보호자 전화번호 체크]

(따르르릉) "저기요, 거기 어디 학교입니까? 왜 자꾸 저한테 문자를 보내시는 거예요? 저는 결혼도 안 했어요."

"네? 아! 죄송합니다. 혹시 00 보호자님 아니신가요?"

"결혼도 안 했고, 애도 없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번호를 잘못 저장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기초조사표를 확인한다. 분명히 종이 보고 제대로 저장했다. 다음 날 학생에게 물어본다. 8이 아니고 0이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크리스트를 만들기로 했죠. 작년에 초안을 만들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ㅁ올해는 학생 번호 어떻게 매길 건지 교무부장님께 여쭤 보기. 나이스 담당자께도 교차점검하기

ㅁ물려받은 컴퓨터의 프로그램 다 실행해 보기. 특히 오피스와 아래한글. 정품인증 확인하기

ㅁ보호자 전화번호 크로스체크하기. 일일이 전화드려 보기. 전화드린 김에 인사드리기


작년에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올해 써먹는 해였죠.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빈 네모를 채워가기만 하면 됐어요. 어릴 적에 하던 메이플스토리가 생각났습니다. 퀘스트 하나씩 깨고 나니 3월이 다 지나갔더라고요. 다행히 올해는 빵꾸 없이 잘 지나갔습니다. 다 체크리스트 덕분이었습니다.




이 책, <운과 실력의 성공방정식>에는 세 가지 영역이 등장합니다.


1. 운의 영역

2. 실력의 영역

3. 운과 실력의 중간 영역


로또처럼 본인이 컨트롤하기 힘든 건 운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체스게임 같은 건 실력의 영역에 가깝대요. 훈련하면 할수록 승률이 높아진답니다. 암튼 이 세 영역에선 전략을 각기 다르게 써야 한대요.


1. 운의 영역: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 두기

2. 실력의 영역: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3. 운과 실력의 중간 영역: 체크리스트 쓰기


운과 실력의 중간 영역의 예도 나옵니다. 비행기 조종 같은 거래요. 파일럿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날씨 같은 운도 따라줘야 한답니다. 이런 데서 위력을 발휘하는 게 '체크리스트'라나요?


멀쩡히 날던 비행기 엔진에 새가 빨려 들어갑니다. 조종석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파일럿은 재빨리 위기대응 체크리스트를 꺼냅니다. 거기서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면 위기 대처가 됩니다.


-엔진에 새가 빨려 들어가서 은 안 좋았지만

-체크리스트가 있었고, 그걸 보며

-신속하게 대처한 실력 좋은 파일럿 덕분에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일에 100% 운의 영역이 얼마나 많을까요? 100% 실력의 영역은요? 제 생각엔 대부분 중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체크리스트로 퉁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올해 체크리스트의 힘을 느꼈습니다. 학교의 2월과 3월을 무사히 넘겼거든요. 내년 학기 초도 두렵지 않습니다. 에버노트에 정리해 놓은 녀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앗, 볼일이 갑자기 급하네요. 근처 공공화장실을 이용해야겠습니다. 어라? 여기도 체크리스트가 있네요! 어디 한 번 읽어볼까요?


ㅁ한 발자국 앞으로 갔는가?

ㅁ볼일 다 봤으면 손 씻었는가?

ㅁ변기에 물티슈 안 넣었지?


휴, 체크리스트 덕분에 무사히 볼일을 봤습니다. 험한 꼴 안 보고 나올 수 있었어요. 오늘은 운이 좋아 보이는데요? 가는 길에 로또라도 한 장...(그만!)



사진: Unsplash의Glenn Carstens-P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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