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판사유감>
사짜라고 다 같은 사짜가 아닙니다. 아, 제가 교사라서 셀프 급나누기 하는 거냐고요? 에이,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것 가지고 확인사살하지 마시고요(엉엉).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한자입니다. 판사, 의사, 변호사의 사짜가 각각 다르거든요.
판사의 사는 일 사(事)입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들고 있는 아이템을 형상화한 글자랍니다. 비야 내려라 얍! 하고 휘두를 때 쓰는 거요.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대요. 부릴 사(使)와 같은 의미랍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관찰사, 병마절도사 할 때 그 사요. 검사의 사도 이거래요. 그래서 판검사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한자가 다르면 합치기가 좀 애매했겠죠?
의사의 사는 뭘까요?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의사를 그냥 부르나요? 아니죠. 선생님을 꼭 붙여드립니다. 네, 의사의 사는 스승 사(師)였습니다. 아, 물론 '양반'을 붙이는 분도 계십니다만, 아주 특수한 경우죠. "여보시오 의사양반! 내가.. 고라니라니!"
스승 사는 언덕을 빙 두른 모양이랍니다. 원래는 군대 조직을 표현하기 위한 글자였대요.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님의 의미도 추가되었답니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 제자들이 빙 둘러앉은 모습이라나요?
마지막으로 변호사의 사는 선비 사(士)네요. 회계사, 세무사와 같은 글자입니다. 고대 무관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손도끼를 본떴대요. 앞선 두 사와 비교해서 훨씬 필드 지향적인 느낌입니다. 참고로 하사, 중사, 상사와 같은 부사관도 똑같은 선비 사를 씁니다. 선비라고 해서 온화한 이미지인 줄 알았는데, 완전 의외네요.
스승에겐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찾아옵니다. 의사 선생님 주위엔 항상 사람이 모이죠. 여기가 아프다, 저기를 고쳐달라 아우성입니다. 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떼 먹힌 돈 찾아달라고 변호사님께 찾아갑니다. 절세할 방법이 없는지 세무사님께 자문을 구합니다. 스승에게든, 선비에게든 최대한 징징거려야(?) 합니다. 내가 살려면 그래야 하죠.
하지만 판사님에게 징징거릴 수 있나요? 신성한 법정에서요? 일 사(事)는 관리를 뜻하는 거라면서요. 통제사 앞에서 억울하다고 징정거렸다간 바로 곤장 맞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판사님과는 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게임으로 치면 npc 같아요. 그냥 365일 법복 입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분들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그런 판사님이 책을 썼습니다. 우연히 그 책을 읽었죠. 평소 좋아하는 블로그 이웃님께서 서평을 올려주셨기 때문입니다. npc의 글이 얼마나 재밌겠냐 했는데,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책 표지를 다시 봤습니다. 판사유감이라길래, '유감스럽다'의 그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감정이 있다(有感)'였습니다.
판사는 글로 승부하는 직업입니다. 하루 종일 하는 게 그거죠. 남이 쓴 글을 읽고, 남이 볼 글을 씁니다. 그것만 수십 년을 반복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감정을 담기 힘들다는 겁니다. 판결문을 새벽 2시 감성으로 쓰면 어떻겠어요?
하지만 판사님도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건 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인간이었죠. 그가 틈틈이 글을 남겼습니다. 마치 일기장처럼요. 그게 모여 책으로 나왔대요.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법복 벗은 판사님의 일기장을 몰래 읽는 느낌이랄까요?
그나저나, 교사의 사는 뭐냐고요? 스승 사 아니냐고요? 글쎄요, 분필 한 10년 잡아 보니, 스승 사보다는 실 사(絲)에 가까운 것 같... (가늘고 길게 or 실낱같은..?)
사진: Unsplash의Tingey Injury Law Fi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