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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버릴 용기

김익한, <거인의 노트>

by 알뜰살뜰 구구샘

소중한 머리카락!


저는 물려받은 게 있습니다. 얇은 머리카락이죠.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어렸을 땐 아주 굵었습니다. 빽빽했죠. 연필을 꽂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결국 그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도 서서히

아버지도 서서히

저도 서서히

(글자 수도 서서히 줄어드는데... 내 볼에 흐르는 건 땀인가 눈물인가 뭔가)


그래서 미용실이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냅다 깎았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깎기 전에 설명해야 합니다. 이래서 소통이 중요합니다.


"저기.. 앞머리는 이렇게 좀 부탁드리고요, 제가 여기가 좀 그렇거든요. (방금 흠칫하신 거 다 봤습니다.) 암튼... 이렇게 저렇게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안경을 벗습니다. 제 시력 0.1입니다. 형체만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젠 미용사님을 믿을 차례입니다.


15분이 지났습니다. 다시 안경 씁니다. 거울 봅니다. 오징어가 저를 쳐다봅니다.(문어라고 하려다가 오징어로 바꿈) 와 진짜... 와... 와......


미용사분은 멋쩍게 웃습니다. "이런 걸 원하시던 거 맞죠..?" 그분도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분도, 저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잘못 없습니다.


'차라리 돈을 두 배로 줄 테니, 깎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러다 유레카를 딱 외칩니다! 관점을 바꾸면 되는 겁니다!


'깎을 때 돈을 두 배로 주면 되잖아?!'


여태 이걸 왜 몰랐을까요. 바로 카카오맵을 켭니다. 미용실을 검색합니다. 동네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곳으로 가봅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대형 미용실은 처음이었습니다. 냄새부터 달랐어요. 은은한 커피 향, 잔잔한 클래식, 딱 좋은 조명, 성공적이었습니다. 안 봐도 알겠더군요. 여기라는 것을요.


"아, 커트하러 왔어요."

"혹시 찾으시는 디자이너분 있으실까요?"

"여기서 젤 비싼 사람이요."


물론 저렇게 저급(?)하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둘러서 말했죠. 그래도 속마음은 저랬습니다. 점장인지 사장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실력 좋은 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 저희 점장님이 두 분 계세요. 가격이 이 정도인데, 혹시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그러면서 가격표를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에, 커트비가 이 정도라고요? 동네 미용실 커트비의 거의 3~4배였습니다. 내 지갑, 괜찮은 거 맞니?


제 흠칫거림을 느꼈는지, 직원께서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고객님, 1회 커트비는 이렇지만, 10회 이용권을 한 번에 계산하시면 이 가격이랍니다.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가격을 봅니다. 3~4배에서 2~3배로 낮아졌습니다. 갑자기 저렴해 보입니다. 냅다 카드를 긁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케팅인가요?!


결제를 하고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마실 걸 고르라고 하시더군요. 커피, 차, 음료수 중에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물 마신다고 했습니다. 따뜻한 물이 한 잔 마시고 싶었어요. 좀 긴장했거든요. 기내 서비스 처음 받는 사람처럼요.


얼마 뒤, 점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보였습니다. 끽해야 5살? 10살? 게다가 남자였습니다. 머리 스타일은 또 얼마나 좋던지, 이런 사람이 디자이너구나 싶었죠.(머리는 또 왜 이렇게 빽빽한 거야 부럽게)


자, 이제 소통의 시간입니다. 여느 때처럼 설명을 했습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요기가 좀 약점이니 보완 부탁드린다고 했죠. 디자이너께선 잠자코 들으셨습니다.


"ok, 알겠습니다."


안경 벗었습니다. 떨렸습니다.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다 됐습니다."


네? 벌써 끝났어요? 뭐야 이거, 3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아니 서비스가 뭐 이래? 깎긴 깎은 거야?! 하며 안경을 썼죠.


거울을 봤습니다. 오징어나 문어가 있진 않았습니다. 그냥 제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원하던 게 딱 이런 거였죠. 있는 그대로 남겨주는 거요.


커트 한 번에 절세미남으로 바뀔 순 없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인지 본판 불변의 법칙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그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오징어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근데 점장님이 그걸 해낸 겁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아니, 점장님... 이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3분밖에 안 지난 거 같은데요? 딱 제가 원하던 머리인 걸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비결이 뭐예요 점장님?"

"이미 정답은 존재해요. 그냥 필요 없는 거 걷어내고, 필요한 것만 남기면 되는 거죠. 커트는 자르는 게 아니라, 남기는 거예요."


미켈란젤로 현실판인가요? 돌멩이 안에 조각상이 이미 있다고 하신 그분이요? 저도 그냥 끄집어 내주신 거예요? 암튼 감사합니다!


2년 동안 그분에게만 커트를 부탁드렸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멀리 이사를 가면서 회원권도 끝냈거든요. 하지만 그분의 명언은 아직도 마음에 있습니다. 남긴다는 말이요.



남기는 거, 열심히 했습니다. 살려면 기록해야 했죠. 부모님께서 그렇게 시키셨습니다. 금전출납부를 적는 조건으로 용돈을 주셨거든요. 안 적으면 문방구 떡볶이 국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적었습니다.


일기도 열심히 썼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보여주는 일기 말고, 진짜 제 거요. 그림일기, 종이일기, 군대 수양록, 에버노트를 거쳐 지금은 원노트에 남기고 있습니다.


기술이 참 좋죠? 이젠 종이가 필요 없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됩니다. 매일 활용하는 앱만 해도 여러 가지입니다. 네이버캘린더, 똑똑가계부, 구글스프레드시트, 에버노트에서 원노트까지. 이젠 순간의 아이디어도 놓치지 않습니다. 녹음버튼 누르고 냅다 지껄이면 되거든요. 스마트한 녀석이 알아서 다 저장해 줍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농업혁명 이후로 인간이 더 고생한다는 거요. 수렵채집하던 시절에는 가끔 사냥하면 됐죠. 나머지 시간엔 동굴에서 뒹굴뒹굴. 그런데 농사꾼이 된 이후로는 더 못 쉰다는 거예요. 동굴에서 놀았다간 작물이 저세상 갈 거니까요. 자연스레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죠.


기록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 메모 한 스푼, 저 생각 한 스푼씩 넣다 보니 끔찍한 혼종이 되기 시작했죠. 주객전도였어요. 기록이 저를 잡아먹는 느낌이었죠. 일기, 스케줄, 생각정리, 스크랩관리 하고 나면 2시간이 순삭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뻗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었죠.


그러다, 운명처럼 <거인의 노트>를 만나게 됩니다.



얼마 전,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어떤 분께서 이 책을 추천해 주셨죠.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냅다 읽어봤죠.


학창 시절에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2시간 동안 붙들다가, 도저히 안 돼서 전교 일등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그 친구가 무심한 말로 "이렇게 해봐"라고 했는데, 그냥 술술 풀리는 겁니다. 이 책이 딱 그 느낌이었어요.


기록에 파묻히지 말랍니다. 버릴 건 버리랍니다. 핵심만 남기랍니다. 다 적을 필요 없답니다. 키워드만 적으래요. 그리고, 버릴 용기를 가지랍니다.


구구절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핵심 키워드는 꾸준히 살아남습니다. "오늘 밤, 로맨틱, 성공적"이 그 예입니다. 저도 그걸 벤치마킹하기로 했습니다. 기록할 때 최대한 버리기로 했죠. 용기를 가지고요.



요즘 에버노트가 맛이 갔습니다. 수년간의 자료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MS사의 원노트로 이사를 가는 중입니다. 이왕 이사 가는 김에, 리모델링도 좀 해야겠습니다. 버릴 건 버리고, 필요한 것만 남겨야죠.


기록을 안 하는 사람에게도 도움 되지만

기록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유용할

<거인의 노트>,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Unsplash의Agustin Ferna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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