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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문과입니다.

안상헌, <인문학 공부법>

by 알뜰살뜰 구구샘

글을 좋아했습니다. 역사도 재밌었어요. 그래서 문과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문돌이가 됐습니다.


이런 성격은 야자 시간에도 튀어나왔습니다. 새로 산 문제집을 풀 때 첫장부터 펼치지 않았거든요. 중간부터 확인했죠. 단원과 단원 사이에 명언 같은 게 있었거든요.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고, 다른 유학자는 저렇게 말했대요. 그게 왜 그렇게 재밌던지. 구매할 때 그것부터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수학 문제집을 고를 때도요.


삼천포로 빠진 적도 있습니다. 시험 기간이었나 봐요. 문제 풀기가 참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딴짓할 수도 없었어요. 야자 감독께 혼나거든요. 그래서 '단원 사이'를 펼쳤습니다. 그곳에서 칭기즈칸을 만나게 됩니다.


시험기간, 남자 고등학생, 역사. 삼박자의 위력은 강력했습니다. 순식간에 몽골 초원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을 때, 저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가 초원을 달릴 때 저도 함께하는 것 같았죠. 더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도서관에 갔죠. 눈을 떠 보니 모의고사 성적표가 빙긋 웃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고른 선택과목에 세계사는 없었습니다.



문과. 재밌었어요. 그런데 그게 죄송할 일이 될 줄은 몰랐죠. 오죽하면 문송하다는 말이 있겠어요? 그 말, 검색창에 찾아봤습니다. 취직이 어려운 문과생을 이르는 말이래요. 반박 불가입니다. 저도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밥벌이 부문 경쟁자가 너무 많습니다.


-언어: 맞춤법 검사기, 파파고.. 강력하다

-문학: MS bing, 깔끔, 성공적

-역사: 적어도 나무위키는 이기고 오자


... 죄송함을 넘어 애도로 진화합니다. 인문학으로 밥벌이하기 쉽지 않네요.


제가 지금 교사를 그만두면? 당장 월급이 안 나옵니다. 비상등이 켜지죠. 여기서 폐관수련을 하면요? 3년 동안 벽곡단 먹으며 인문학 책 1,000권 읽는다면? 무림의 고수가 되어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전 열흘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것 같습니다. 일단 기저귀값 벌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인문학은 판타지입니다.



물론 독서, 요즘도 열심히 합니다. 대신 종류가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소설, 역사책 위주로 읽었거든요. 특유의 긴 호흡이 좋았습니다. 배경을 제 맘대로 상상하는 맛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사치입니다.


요즘은 실용서적 위주로 읽습니다. 인테리어 정보, 협상하는 방법, 세금 아끼는 전략 같은 거요. 오늘 당장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젠 부모님 말씀을 알겠어요. 자다가도 떡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이것도 반복되면 지칩니다. 그럴 땐 자기계발서로 머리를 식힙니다. 아니, 사실은 뜨거워져요. 피가 나거든요. 회초리를 맞습니다. 인생 선배들이 사랑의 맴매로 때찌하십니다.


실학 - 회초리 - 실학. 쳇바퀴를 돌립니다. 계속하다 보니 맛탱이가 갈 것 같습니다. 이게 인간의 삶인지, 부품의 회전인지 헷갈립니다. 톱니바퀴가 붕괴될 때쯤, 녀석들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인문학이죠.


"야, 너 그러다 맛 가겠다. 하루 종일 문제만 풀면 되겠어? 중간중간 명언도 봐야지. 1단원 끝났으면 좀 쉬어라. 어떻게, 공자로 한 잔 줄까? 아니면 소크라테스로 한 잔 줄까?"



물론 인문학도 돈 됩니다. 문제는 정점을 찍어야 한다는 거죠. 취미로 겉만 핥는 제겐 자비 없습니다.


정점에 계신 분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조승연 작가'입니다. 그냥, 너무 좋아요. 그의 말과 글에서 헤엄치는 게 즐겁습니다. 그의 지식부터 언어적 능력, 문화 이해력, 역사 해석력까지. 전부 다 부럽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가 생계를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겉만 봐선 돈 걱정 안 할 것 같아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159만 유튜버잖아요. 저처럼 무지출 챌린지 같은 걸로 고민하진 않겠죠?


아, 저도 늦은 거 아니라고요? 도전해 보라고요? 응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깜냥은 제가 잘 압니다. 손흥민 선수 보고 축구학원 가는 거랑 비슷할 걸요? 저 진짜 운동신경 없거든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인문학에서 정점을 찍은 분이 쓰셨습니다. 철학, 문학, 역사.. 깊이가 어마어마합니다. 또 얼마나 쉽게 쓰셨는지, 거의 이유식 수준입니다. 몇 번 안 씹어도 넘어갑니다. 소화도 잘 돼요.


안 그래도 요즘 톱니바퀴에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휴식이 필요했어요. 그때 이 책을 만났습니다. 심지어 저자 직강도 들었어요. 덕분에 달콤한 꿈을 꿨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그거요.


하지만 이제 꿈에서 깨야 합니다. 철학과 문학과 역사의 바다에서 나와야 합니다. 끙차! 톱니바퀴를 다시 굴립니다. 삐그덕 대며 돌아갑니다. 그리고, "제네시스박의 부동산 절세"를 마저 읽으러 갑니다.



근데, 자꾸 눈길이 갑니다. 뒤돌아보게 됩니다. 어쩌죠? 야단 좀 쳐 주세요..



인문학,

못 끊어서 죄송합니다.



사진: Unsplash의Nick Few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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