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떻게 죽을 것인가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by 알뜰살뜰 구구샘

어머니는 아팠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15년 동안. 목에 인공호흡기를 꽂았다. 쉭쉭거리는 기계 소리도 함께했다. 어떨 땐 해수욕장에 온 것 같았다. 튜브에 바람 소리. 다른 날엔 뱀 같았다.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 쉬는 시간은 없었다. 주말도 없었고, 밤낮 가리지 않았다. 적막은 곧 죽음을 뜻했다.


혼자 씻을 수 없었다. 화장실도 못 갔다. 돌아 눕지도 못했다. 앉지도 못했다. 매트리스와 몸은 24시간, 일주일, 한 달, 1년, 15년을 함께했다.


정신은 멀쩡하셨다. 손도 멀쩡했다. 불행인가, 다행인가. 전달하고 싶은 건 글로 쓰셨다. 지마켓과 옥션으로 장도 봤다. 양파도 까고 마늘도 까셨다. 침대 위는 어머니의 작업실이었고, 부엌이었으며, 식탁이었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셨다.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4년 동안 공부하셨다. 나보다 학점이 높았다. 시도 많이 남겼다. 누워 있을 땐 휴대전화로, 앉아서는 노트북으로. 시상이 떠오르면 바로바로 기록하셨다.


가끔 공모전에 도전하셨다. 물론 귀찮은 건 아들인 내 담당이었다. 손질되지 않은 날것의 시를 받는다. 공모 요강을 확인한다. 틀에 맞게 다듬는다. 제출한다. 얼마 뒤, 아쉽게도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낙방이 계속되니 응모 횟수도 줄어들었다. 점점 시를 짓지 않으셨다. 태블릿 pc로 드라마만 보셨다. 마동석 배우가 나와 악당들을 물리친다.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 어머니도 함께 주먹을 꼭 쥔다. 그게 "와!"라는 탄식이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장애인은, 그렇게 주먹소리라도 낸다.



아들은 잔소리를 했다.


"저 보고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사세요? 매일 드라마만 보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요새 장애인도 SNS 많이 하던데, 어머니도 하시면 안 돼요?"


입이 뚫렸다. 계속 지껄였다.


"아니면 블로그라도 어때요? 저도 해봤는데, 꽤 괜찮아요. 어머니 시 짓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다듬어 드릴게요. 일단 뭐라도 해 봐요. 채널명은 '앞은, 시' 어때요? '아픈 시'라고 읽히기도 하고, '시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도 있어요. 같이 해 봐요 어머니."


"눈이 침침해서 글자가 잘 안 보여. 손에 힘도 잘 안 들어가. 타자 치기가 어려워.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드라마 보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기 싫으니 핑계 대는 거라고 여겼다. '하,'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게 어머니와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다.



어머니는 얼마 뒤 돌아가셨다. 심장마비로. 15년 동안은 기계가 억지로 숨을 불어넣어 줬다. 근데 그것도 한계였나 보다. 한반도 남쪽에 사는 아들은 5시간 걸려 중환자실로 향했다. 그때야 알았다. 변명이 아니었다는 걸.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가 책을 한 권 냈다. ISBN 번호까지 있는 책이었다. 자비로 출판했단다. 어머니의 시를 싹 엮어서 말이다.


첫째 아들에게 한 권, 둘째 아들에게 한 권, 며느리에게 한 권, 그러고도 책이 많이 남았다. 지인들에게 뿌리기 시작하셨다. 속으로 생각한다.


'그거 누가 보는데요? 솔직히, 아버지도 끝까지 다 안 보셨죠?'


피붙이도 완독이 힘든데, 생판 모르는 남이면 어떨까. 첫 장도 안 넘길 거다. 장담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완고하다. 부득부득 남들에게 책을 나눠준다.



사실, 아버지의 자비출판은 처음이 아니다. 그전에 당신 본인의 책도 내셨다. 직접 지은 한시를 엮어서 말이다. yes24에 검색하면 나온다. 4,750원으로.


이 책도 물론 창고에 많이 쌓여 있다. 여기저기 퍼트려지고 남은 것들 말이다. 세상에 몇 명이나 읽었을까? 일단 아들인 나부터 안 읽는데 말이다.


"나는 읽히길 바라고 책을 쓴 건 아니야"


아버지께서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처구니가 없다. 읽히지도 않을 책, 왜 내요? 돈이 남아돌아요? 남들한텐 왜 나눠주세요? 냄비받침으로 쓰라고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남이 읽어주길 바라시죠?




솔직히, 이어령이라는 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베스트셀러길래 골랐습니다. 교직원공제회 이벤트로 당첨되어 책을 받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제 돈 주고 사서 읽진 않았을 겁니다.


제목과는 다르게, 저자가 이어령 본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처럼 보이는 젊은 작가였어요. 임종 직전의 스승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고, 그걸 모아 책으로 낸 것 같았습니다.


'뭐가 그리 잘났는데? 예수님이야? 공자님이야?'


맥락이 없으니 1차적인 감정이 올라옵니다. 질투요. 내 부모 책은 골방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이 책은 4개월 만에 18쇄까지 나왔어요. 뭐가 그리 잘나셨길래, 다들 한 말씀 듣고자 줄을 서는 겁니까?



책을 덮을 때쯤, 질투가 수긍으로 바뀝니다. 인생 진짜 진하게 사셨던 분이네요.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신이든, 눈이든, 마음이든요.


삶을 알려면 죽음을 직면해야 한답니다.

죽음을 가까이하면, 삶이 더 잘 보인답니다.

'메멘토 모리'를 되뇌랍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랍니다.


어머니가 죽음을 직면했는진 모르겠습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셨을까요? 이젠 여쭤볼 수가 없네요. 아버지는 어떨까요? 아들인 제가 보기엔, 전혀 준비를 안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사실 줄 아셨던 것 같아요. 그냥 외면하고, 덮어놓으셨습니다. 똑바로 바라보질 않으셨어요.


살면서 깨달은 진리 하나가 있다면, 단연코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절대 바꿀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 바꿀 수 있다."


아들로서도, 군대 병장으로서도, 학교 선생으로서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등병을 못 바꿨습니다. 학생들? 안 바뀝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저라도 바뀌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호흡기를 달던 15년 전, 그때부터 죽음을 직면했습니다. 어제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오늘 사라질 수 있겠더군요.


죽음을 빤히 쳐다봤습니다. 옆구리에 소중히 끼고 살았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꼭 함께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의식하는 건 아닙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림자쯤 될까요? 평소에는 안 보이다가, 가끔씩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떼어내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크기는 작아질지언정, 없어지진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과 친하게 지낸 지 15년, 삶이 더 진하게 찾아옵니다. 만약 오늘 당장 죽는다면 어떨까요? 이대로 죽긴 아쉽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 같거든요.(물론 맞춤형 복지포인트 사망보험금 2억으로 선택한 것도 한몫 함.)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210쪽 중)


"어이, 구구샘, 너는 어떻게 죽을 건데?"



사진: Unsplash의Jon Tyson

keyword
알뜰살뜰 구구샘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구독자 260
매거진의 이전글행님, 이거 우째야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