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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말고도 흐르는 게 있다

지나영, <마음이 흐르는 대로>

by 알뜰살뜰 구구샘

신사임당 유튜브에서 처음 만나뵀습니다. 저자인 지나영 교수님을요.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쪽 세계를 잘 모르는 저도 존스홉킨스는 들어봤습니다. 뛰어난 실력의 의사 선생님이겠구나 생각했죠.


교수님께서 인터뷰 중간중간 영어를 쓰십니다. 발음이 완전 네이티브입니다. 저의 배경지식이 자동반사로 개입합니다. '저분은 교포 거나, 강남 8학군 출신일 것이다'


성함도 지나 영(Jina Young)인 줄 알았습니다. 성이 영 씨고 이름이 지나인 줄 알았죠. '희귀한 성씨를 가지셨네, 화교 출신이신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한국말을 하실 땐 사투리를 쓰세요. 경상도, 그것도 경북 쪽 사투리였습니다. 제 아버지가 경북 분이시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없습니다. 100% TK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존스홉킨스 + 미국 원어민 발음 + TK사투리 + Jina Young... 순대를 케첩에 찍어 먹는 느낌입니다. 이질적이면서도 매력적입니다.(물론 걔를 케첩에 찍어먹어 본 적은 없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대구가 고향이라고 합니다. 대구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성함도 Jina Young이 아니라, Ji Nayoung이었네요.


경상도는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PK보다 TK가 좀 더 세죠. 거기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둘째 딸이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당연히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산일에 보니 또 딸이었대요.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셔서 병원비도 안 내고 되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친척이 돈을 대신 내줬대요. 병원비가 모자랐는데, 사연이 얼마나 딱했던지 병원에서도 할인해 줬답니다.


그 둘째 딸은 자라서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부모님이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대요.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레퍼토리입니다. 이 정도 스토리로 책 한 권이 나오나? 싶었습니다.


의대 입학 후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저자님은 의대 졸업 후, 의정부에서 1년 동안 인턴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정신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신청했대요. 하지만 거기서 탈락했다고 합니다.


이러면 보통 의사 알바를 하면서 재수를 한다네요. 하지만 교수님은 '미국 의사 면허증이나 따 보자'라고 생각하며 미국으로 넘어갔답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요


미국 생활은 당연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실수가 많았대요. 정신과는 특히 말과 글이 중요한 과인데 말이죠. 이걸 극복하기 위해 잠을 줄여 가며 영어를 공부했답니다.


시간이 지나니 영어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과 조교수가 되기엔 부족할 수도 있었대요.


미국 환자들이 '아, 의사 선생님이 영어가 좀 서투르시다고요? 제가 그럼 이해하기 쉽게 설명드릴게요'라고 할리가 없습니다. 그냥 의사가 실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역경도 어떻게든 극복했다고 합니다. 각종 면접 준비를 철저히 했대요. 결국 여러 대학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하버드 의대도 있었대요.


하지만 저자는 하버드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더 이끄는 곳인 노스캐롤라이나로 갔대요. 그 후에는 존스홉킨스 의대로 갔습니다.


존스홉킨스 의대가 있는 볼티모어에선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났답니다. 길거리에 마약중독자들도 많았대요. 존스홉킨스 의대는 그런 곳에 있다고 합니다. 대학 설립 취지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들 가까이 있자'래요. 저자는 그런 곳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요.


그곳에서 행복하게 사시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진짜배기 이야기가 또 남아있었습니다.


갑자기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고 합니다. 업무, 운동은 커녕 서 있는 것도 힘들었대요. 증상이 심할 땐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했답니다. 저자는 세계 최고의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당연히 최고의 의료진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아무도 정확한 원인을 못 찾았답니다.


심지어 정신과적 문제가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동료도 있었답니다. 세상에, 정신과 의사에게 그렇게 말하다니! 독자인 제가 봐도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이 몰려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울증이나 정신과적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답니다. 결국 돌고 돌아 면역 및 자율신경계 이상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냈대요. 물론 이것도 쉽게 알아낸 건 아니었습니다. 고군분투를 하면서 찾아냈대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병인지 아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다는 사실을요. 심지어 병원의 최전선에 있는 의사인데도 말입니다.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진료도 볼 수 있게 되었대요. 하지만 예전처럼 무리하지는 않는답니다.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복귀한 후로는 환자의 입장에 공감하려고 더 노력하신답니다. 환자의 처지가 얼마나 막막한지 겪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제목은 '마음이 흐르는 대로'입니다. 영어로는 Follow your heart네요. '마음대로'가 아닙니다. '마음을 따라서'도 아니죠. '흐르는'은 도대체 왜 들어간 건지 생각했습니다.


흐른다는 표현은 보통 액체에 씁니다. 물이 흐르고 강이 흐르죠. 물론 아주 가끔 침이 흐를 때도 있습니다.


강물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따릅니다. 누군가 억지로 막아놓아도 소용없습니다. 다른 쪽에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사계절 일정한 양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바싹 마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날은 너무 많아 넘치기도 하죠.


포기가 없습니다. 한쪽이 막혔다고 해서 흐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둘러가든, 넘어가든, 밑으로 가든 어떻게든 갑니다.


저자의 인생이 마치 강물 같습니다. 그 강물이 어느새 제 발을 적셨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온 몸이 물에 폭 잠겼습니다. 시작은 강물이었는데 끝은 온천물처럼 따스합니다.


책의 제목을 다시 봅니다. 한 번뿐인 인생, 남이 시키는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책을 다 덮으니 글자가 스멀스멀 바뀝니다. YOUR 이 MY로요.


네, 그럴게요 작가님

"Follow my heart"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쓰는 데 정말 오래 걸렸네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서평 하나 쓰는데 2시간 남짓 걸리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개요 하나 짜는 데에도 2시간 넘게 걸렸고, 다 쓰는 데에는 7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를 향한 동경인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인지, 저도 그처럼 열심일 수 있다는 희망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모두일 수도 있고요.


아픈 사람 있는 집에는 긍정이와 희망이가 잘 안 들어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환자 본인도, 간병하는 가족도 장기전에 녹다운이 되기 쉽거든요.


하지만 저자는 본인 병을 치료하면서도, 아버지 간 수술을 간병하면서도,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도 긍정과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본인도 상태가 좋아졌고, 아버지도 5%의 확률을 뚫고 건강해지셨으며, 본인이 돌본 환자들도 많이 좋아졌다네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저는 한 번도 어머니가 호전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의사가 호전은 없다고 했거든요.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고 했었습니다.


만약 제가 호전될 거라고 믿었다면

마음속에 긍정이와 희망이를 품었다면

결과가 좀 달랐을까요?


아, '흐르는 것' 하나가 더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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