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홀로 육아를 해야 합니다. 아내가 저녁 일정이 있거든요. 어린이집 픽업부터 저녁식사, 목욕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마침 냉장고가 텅 비었습니다. 이마트에서 배달을 시켰죠.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한 손엔 아이를, 다른 한 손엔 장본 물품을 듭니다. 양팔 가득 사랑입니다.
"아빠는 이거 좀 냉장고에 넣을게."
두부, 콩나물, 특히 숙주나물은 신속함이 생명입니다. 아이의 안전이 확보되고 나면, 걔네들의 신변을 책임져야 합니다. 망설임 없이 냉장고 속으로 직행해야 하죠.
하지만 아에에게 자비란 없습니다. 아빠가 냉장고 정리를 하는 동안 열람실에서 자습하지 않죠. 배송된 물품을 만져보려 용을 씁니다. 이러다 포장지 찢어지겠습니다.
"자, 요기 드라이아이스가 있네! 이걸 물에 담그면 어떻게 될까?"
흰 연기로 관심을 돌립니다. 물론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죠.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두었습니다. 이걸로 또 30초 벌었습니다. 후딱 냉장고에 넣어야지!
자, 냉장고 정리 미션은 끝냈습니다. 이제 저녁밥 차리기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오늘 메뉴는 감자채볶음과 크림소스스파게티입니다. 양파 썰고 감자 썰고 요 썰고 저 썰고 복숭아 밑으로 썰면 됩니다.
물론 따님께서 식탁에 앉아 가만히 기다려주진 않습니다. 싱크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려고 용을 씁니다. 의자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올라섭니다. 아빠가 칼질하는 걸 보네요. 혹시나 다칠까 멀찍이 떨어집니다. 딸 신경 쓰다가 제 손가락을 안 썰어야 할 텐데 말이죠.
”아빠, 요리하시는 동안 티비를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요 녀석, 협상의 대가입니다. 수락하고픈 마음이 굴뚝입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죠. 티비 한두 번 보여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초장에 잘 잡아야 합니다. 웃으며 거절합니다.
"그럼 이 서랍을 열어주는 건 어때요?"
아... 평소에 봉인해 두었던 서랍입니다. 달걀 거품기, 뒤집개, 수세미 같은 게 들어있는 칸이었죠. 자물쇠 같은 걸 채워놨는데, 그걸 열어달랍니다. 이 정도는 수락할 수 있죠. 3분 정도는 확보했습니다.
감자채볶음을 끝내고 크림스파게티로 넘어갑니다. 고기와 양파 손질은 완료했습니다. 이제 버섯을 넣을 차례입니다. 마침 이마트에서 배송 온 새송이버섯이 있었습니다. 신선한 채소 들어갑니다!
어라? 그런데 버섯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뿌리 부분에 하얀 곰팡이가 있네요.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버섯 자체가 '균류' 아닌가요? 뿌리 부분 넉넉히 썰어서 본체만 먹으면 되죠 뭐.
칼질하려는 순간, 버섯의 갓 부분을 봤습니다. 머리 부분이요. 거기도 흰 곰팡이가 수줍게 웃고 있더군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령당한 겁니다. 아무리 비위가 좋아도, 이건 못 먹겠더군요.(못 봤으면 맛있게 먹었을 거면서)
평소에는 운 없다 생각하고 그냥 버렸을 겁니다. 어차피 '하루채소'라고 해서, 저렴한 제품이었거든요. 한 봉지에 새송이버섯 2개만 든 거요. 사실 스파게티에 버섯 빠졌다고 해서 난리 나는 건 아닙니다.(하지만 마늘은 빼면 안 됨. 한국인의 소울푸드)
근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마트에서는 이걸 어떻게 대처할지요. 대기업이니, 순순히 교환해 줄까요? 그냥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문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아이 재우고 전화하면 좋지만, 그땐 영업시간 끝날 겁니다. 적당히 눈치 봐서 전화해야죠.
자, 밥은 다 차렸습니다. 아이 식판은 다 채웠어요. 밥, 국, 반찬 세 칸. 가득합니다. 뭐, 그중에 간택받는 건 한두 종류겠지만요. 암튼, 주방장의 도리는 다했으니, 식사를 해볼까요?
평소 같으면 딸이 알아서 먹습니다. 4살이지만, 나름 포크질 잘해요. 알아서 잘 먹는다는 뜻이죠. 저도 함께 밥을 먹으며 고객센터에 전화한다면? 완벽한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멀티태스킹이다!
고객센터로 전화했습니다. 보이는 ARS를 뚫고 상담원과 연결됐죠. 아, 여기가 아니랍니다. 이 번호는 오프라인 매장 전용이래요. 배송 문의는 다른 데로 하랍니다.
"아빠, 어디 전화해?"
앗, 딸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밥에는 더 이상 관심 없어진 눈치입니다. 제 통화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큰일입니다.
"전화? 이마트에 하지."
멋쩍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제발 여기 관심 가지지 마! 밥 먹는 거에 집중해!
"이마트? 지에스마트 말고? 왜?"
"새송이버섯에 곰팡이가 펴서, 전화해 보는 거야."
"그럼 보이는 걸로 바꿔 줘."
딸은 음성 전화보다 영상통화가 익숙합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서 전화할 땐 거의 영상으로 하거든요. 멀리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연락할 때요. 그래서 일반 음성 통화는 싫어합니다. 뭐라고 하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건 보이는 거 안 돼."
"왜 안 돼?"
"콜센터에는 그 기능 없어."
"왜 없어?"
"이마트 기술의 한계겠지."
"기술 한 개?"
"한계. 한 개 말고 한계."
"... 아빠, 보이는 걸로 바꿔 줘."
"......"
그러는 사이 통화가 연결되었습니다. 콜센터 직원께서 상냥한 목소리로 응대해 주셨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바로 해결책을 알려주셨습니다. 곰팡이 핀 사진을 찍어 링크로 보내면 된답니다. 그러면 새 제품으로 보내주겠대요. 기존 제품은 문 앞에 두면 된대요.
통화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딸의 눈빛이 변했어요. 살기가 살짝 느껴졌습니다. 아빠가 외간 여자랑 통화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걸까요?
식탁 의자에서 내려갑니다. 거실에서 책을 들고 옵니다. 시위하듯 책을 올려놓습니다. 읽어 달랍니다. 아빠 아직 통화 안 끝났는데?
안 읽어주니 딸이 저를 응징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소리, 분명 수화기 너머로 전달됐을 겁니다. 콜센터 직원분의 목소리가 다급해집니다. 남은 설명은 래퍼처럼 해주셨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죠. 원하던 책을 읽어줬습니다. 만족했는지, 딸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이마트에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교환 접수 완료. 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제품 회수 예정. 새 제품도 그때 배송 예정]
회수는 좋습니다. 출근할 때 문 앞에 두고 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새 상품 수령이 문제입니다. 그 시간에는 못 받습니다. 근무하고 있을 시간이잖아요.
다시 콜센터에 전화했습니다. 따르릉, 통화 연결음에 딸의 눈빛이 또 바뀝니다. 제발 이번에는 무탈히 넘어가라. 제발.
이번에는 다른 상담원이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저도 급하게 상황을 설명드렸죠. 제품 회수 및 수령 시각을 바꾸고 싶다고요.
"이거 읽어 줘!!! 으앙!!!!!!!"
역시, 딸이 의자에서 내려왔습니다. 제 무릎을 붙잡으며 떼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것 또한 수화기 너머로 전달됩니다. 이번 상담원도 눈치가 100단이신 것 같습니다. 래퍼처럼 남은 설명을 해주셨어요. ‘척하면 딱’ 느낌으로 일을 처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통화가 끝났습니다. 휴.
4살 딸에게 ‘아빠 통화해야 하니, 그동안 조용히 밥 먹어.‘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 키우는 집이면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그게 되면 아기가 아니죠. 몸집 작아진 명탐정 코난일 겁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나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젠 마을을 넘어 콜센터 직원까지 도와주시는 느낌이네요.
상담원 두 분 모두 눈치가 백 단이었습니다. 일처리 하시는 동시에 수화기 너머 아이까지 달래주시는 것 같았어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설마, 저를 달래준 건 아니었겠죠?
사진: Unsplash의Quino 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