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뚜벅이입니다. 버스 타고 출퇴근합니다. 그게 뭐 대수냐고요? 지방 소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버스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저뿐인 걸로 압니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는 40~50분에 한 대 옵니다. 그거 놓치면 파멸입니다. 급똥이라도 마려운 날은 하늘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일찍 나서야 합니다. 한 대를 놓쳐도 다음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죠. 학생보다 선생이 늦을 순 없잖아요.
이런 저에겐 작은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한 정거장 일찍 내리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루틴을 지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먼저, 알뜰교통카드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카드는 뚜벅이 출퇴근러를 위한 카드입니다. 지자체 예산이 투입되는 상품이죠. 월 15회 이상 카드를 써야 실적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 회당 250~350원 정도 페이백을 해줘요. 버스 1회 탑승료가 1,450원인데요 그중 350원이면 거의 25% 할인율입니다. 완전 이득이죠.
그런데 버스를 타기만 해서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습니다. 핵심은 정거장에서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스마트폰이 제 걸음 수를 측정하고, 그걸 서버에 전송해요. 많이 걸으면 걸을수록 한도치(250~350원)에 가까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많이 걷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 정거장 일찍 내려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삼성헬스입니다. 이 녀석은 수시로 알림을 보내줍니다. 하루 목표를 1만보로 설정해 놓았거든요. 손목에 있는 워치도 진동으로 알려줍니다. "5천 보 걸었어요! 힘내세요!", "오늘도 목표를 달성하셨군요, 멋져요!" 같은 메시지도 함께요. 이거 받으면 은근히 기쁩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틈틈이 게이지를 채워요. 한 정거장 일찍 내리는 건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 루틴을 깨버렸습니다.
출퇴근 버스를 타는 시간은 30분 정도입니다. 그 안에서 보통 책을 읽지요. 아침 6시 50분 언저리에 타기 때문에 버스 안에 승객도 적습니다. 당연히 앉아서 갈 수 있죠.(지방 소도시) 책 읽기 딱 좋은 조건입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벨 누르는 걸 깜빡했습니다. 완전 난감했죠. 더 어처구니없는 건 오늘 읽은 책이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겁니다. 이거 읽다가 제 작은 습관이 망가질 위기였어요.
'에이, 오늘은 그냥 제 위치에 있는 정거장에 내릴까?'
악마가 속삭였습니다. 네, 맞습니다. 당연히 정위치의 정거장에 내리면 편합니다. 덜 걸어도 되잖아요. 알뜰교통카드야 뭐, 끽해야 350원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봐줘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루틴을 깨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짱돌을 굴렸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죠!
'늦게 내리면 되잖아?!'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실행하기로 했죠. 정위치의 정류장을 지나칩니다. 버스 기사님이 의아해하는 눈치입니다. 그분도 저도 알거든요. 이쯤 되면 내린다는 사실을요.(새벽 버스 타는 분들 다 아시죠?) 멋쩍게 웃으며 한 정거장 더 지나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정거장 늦게 내려보기로 했죠.
끼이익, 버스 뒷문이 열립니다. 바깥공기를 들이마십니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겨울이 가까이 온 듯합니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완전히 새로운 풍경입니다. 심지어 햇살마저 다른 느낌이었어요.
'여기 pc방이 있었어? 코인노래방도 있네! 우리 반 아이들이 하교하면 이쪽에서 놀까?'
두 정거장 늦게 내렸지만, 여기도 우리 학구입니다. 저희 반 학생 중에 이쪽에 사는 학생도 있어요. 그 아이들이 등교하는 길을 저도 따라 걸어봅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옵니다. 타이밍 놓친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낯선 모험은 길지 않았습니다. 몇 분 지나니 다시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어요. 학교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뒤 학생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옵니다. 그들도 반갑게 인사합니다. 저도 웃으며 맞이합니다. 어라? 제가 오늘 걸었던 길로 등교한 학생이 보이네요. 그 학생에게는 더욱 목소리 높여서 인사해 봅니다.
"반갑습니다! 학교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요? 오늘 하루도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