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2학기 보호자 상담주간이었다. 순서에 맞게 전화를 드렸다.
요즘은 주양육자가 다양하다. 이번에도 어머니 6 : 아버지 4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할아버지나 할머니인 경우도 있고, 센터장님과 통화하는 경우도 있다.
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께 연락하는지는 안 물어본다. 그걸 물어본다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 반대로 생각하면 답 나온다. 학기 초에 어머니 전화번호 받았을 때, "왜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께 연락드려야 하죠?"라고 한다면? 다들 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왜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하고, 아버지께는 아버님이라고 할까?
나만 이런 게 아니다. 내 대학 동기들(그러니까 교사들)도 보통 이렇게 말한단다. 물론 둘 다 '님'자 붙이는 동기도 꽤 있었다. 공평하게 어머님, 아버님으로 말이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딸의 담임선생님, 이번에 4번째다. 대체로 아내를 '어머니'로, 나를 '아버님'으로 불러 주시더라. 원장선생님도 마찬가지였고.(물론 아닌 분도 간간히 있다. 둘 다 어머님, 아버님으로 불러주시는 분도 계신다.)
실제로 불러보면 어떨까? 각각 소리 내 읽어봤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길동이 담임입니다~"
음, 걸리는 거 없이 자연스럽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길동이 담임입니다~"
순식간에 뭔가... 어머니들의 나이를 10살 올린 느낌이 든다. 미묘한 거리감도 들고.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동기들 중에는 존중+양성평등의 의미로 둘 다 '님'자를 붙이는 친구들도 많다.
이건 어떨까? 어머니, 어머님 말고 '엄마'를 붙이는 거다. <엄마를 부탁해>를 쓴 신경숙 작가가 그랬다더라. 초고를 다 쓰고 나서 뭔가 애매했는데, 어머니를 엄마로 바꾸니 완전 매끄러워졌다고.
"안녕하세요 엄마~ 길동이 담임입니다~"
... 엄마라니, 군대 전역한 이후로 '엄마'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엄마라고 부르진 않았다. 세상에,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1) 엄마
2) 어머니
3) 어머님
여러 번 소리 내어 불러 봤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가장 친숙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엄마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어머님은 너무 거리감이 느껴진다. 마치 가게이서 "이모!"라고는 하지만 "고모!"라고는 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랄까?
자, 이제 아버님 차례다. 이쪽은 왜 아버님일까? 역시 이것도 소리 내어 말해 봤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길동이 담임입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길동이 담임입니다~"
"안녕하세요 아빠~ 길동이 담임입니다~"
일단 아빠는 탈락이다. 이건 엄마보다 더 심하다. 아빠라니, '아빠, 어디 가?'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이건 도저히 아닌 것 같다.
그럼 아버지는 어떨까? 여자 쪽을 어머니라고 했으니, 남자 쪽도 아버지라고 하는 게 양성평등에 맞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왠지 홍길동이 생각난다. 아버지라고 하니 살아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 같다. 만약 어린이집 다니는 딸의 담임선생님이 나보고 '아버지'라고 한다면?
'저 선생님의 직계존속 아닌데요...'
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너무 가까운 느낌? 훅 들어오는 느낌?
아니, 애초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게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여자 쪽은 어머니라고 하잖아. 심지어 나도 보호자를 그렇게 부르고. 그런데 왜 남자 쪽은 아버님이라고 거리를 두지? 육아를 여자가 도맡아야 한다는 농경 사회의 유산인가?
앗, 여기서 나도 모르는 무의식이 튀어나왔다.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1) 어머니보다 존대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2) 어머니보다 거리가 느껴진다는 의미
였다는 거다. 글을 쓰다 보니 그게 명확히 보인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 거리감이 느껴질까?(역시 개인적인 느낌이다) 어머니가 육아를 더 잘해서? 아이를 더 잘 챙겨서?
초등학교 담임 10년 차로서, 이건 성별과 상관없다는 거 알고 있다. 준비물 챙기고 안내장 제출하는 거, 여자보다 더 꼼꼼히 챙기는 남자도 있다. 되려 아버지 쪽에서 '2학기부터는 엄마에게 연락하지 말고, 나에게 연락하라'라고 하는 분도 계셨다. 실제 결과도 아버지가 더 꼼꼼했다. 적어도 그 가정은 말이다. 그러므로 '육아는 엄마가 하는 게 맞지'라는 말은 거짓이다. 성별과 전혀 상관없다.
혹시 목소리 때문일까? 보통 여자보다는 남자 목소리가 굵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남자가 더 목적지향적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상을 탔다고 해볼까?
[어머니와의 통화]
"안녕하세요 어머니~ 길동이가 이번에 대회에서 상을 탔어요~"
"어머나! 정말요 선생님? 잘됐네요! 집에 오면 칭찬 많이 해야겠어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과의 통화]
"안녕하세요 아버님~ 길동이가 이번에 대회에서 상을 타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렇군요."
"길동이가 평소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 네."
"오늘 하교하면 칭찬 많이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선생님."
물론 이것도 내 고정관념일 수 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어머니가 있을 수도 있고, 살갑게 말씀해 주시는 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10년 간 축적한 스몰데이터(신뢰 수준 5%에 오차범위 ±95%p)는 대체로 저렇다. 남자 쪽이 좀 더 단답형이고, 목적지향적이다. 한 마디로 리액션이 다르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뻑뻑하게 굴러가는 나의 변연계로 짱돌을 굴려본 것을 정리해 본다.
1) 어머니는 어머니, 아버님은 아버님이라고 하는 게 속이 편하다.(적어도 내가 담임일 땐)
2) '높고 낮음' 보다는, '가깝고 먼' 느낌에 가깝다.
3) 맞다, 솔직히 어머니랑 통화하는 게 더 편하다. 아버님께 전화드리면 왠지 군대 선임께 보고하는 느낌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나까'체가 나온다. '여보세요'가 아니고 '통신보안'이라고 할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아버지가 불편하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도 편한데, 어머니는 더 편하다는 뜻이다.)
사실, 호칭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대화는 알맹이가 더 중요하다. 그냥 하던 대로 해야겠다.
그나저나,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뭐라고 해야 하지? 항상 고민된다. 여태까진 '할머님, 할아버님'으로 불러왔다. 생각해 보니 여긴 또 성별 상관없이 다 '님'을 붙여왔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 이건 명절에 시골 내려가서 그분들 품에 쏙 안길 때 하는 말 아닌가? 우리 반 학생 보호자께 쓰기는 좀..?
[딩동]
키즈노트 앱이 울렸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께서 딸의 사진을 올려주셨다. 문구에도 정성이 가득하다. 어머니고 아버님이고 간에, 에라 모르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댓글을 달아야겠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아닐까?
사진: Unsplash의Kelly Sikke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