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학예회 시즌이다. 그리고 나는 올해 학예회 담당교사다.
어린이집에 애를 보낸 아빠로서, 학예회 참 좋다. 보는 거 말이다. 얼마나 귀여운가. 무대 위에서 재롱부리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힐링이 따로 없다. 물론 영상도 찍는다. 전체 샷도 찍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자식을 화면 중간에 놓게 된다. 집에 돌아와 몇 번이고 다시 본다. 아무튼, 학예회 관람은 정말 기대된다. 이렇게 좋은 행사, 내 업무가 된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학예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학급학예회와 전체학예회. 전자는 각 반에서 모든 걸 알아서 한다. 반에서 사회자 알아서 뽑고, 진행도 알아서 한다. 담임교사와 반 학생들의 취향에 따라 무대가 꾸며진다. 교실 안에서 말이다.
반면 전체학예회는? 보통 체육관이나 강당에서 한다. 학교에서 가장 큰 무대에 올라간다는 뜻이다. 조명이나 음향 업체를 부르는 경우도 많다. 1~6학년 보호자가 한 자리에 모여 모든 학년의 무대를 관람한다.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무대에서 끼를 뽐낸다.
담당자 입장에서 업무 난도는 어떨까? 당연히 전체학예회가 훨씬 힘들다. 최소 10배는 더 신경 써야 한다. 반별 학예회는 딱히 할 게 없다. 예산 잡아서 품의 올리고, 담임 선생님들께 전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전체학예회는? 말 그대로 공연 기획자가 되는 거다. 흔히 말하는 교육공동체 3요소(학생, 학부모, 교사)에다 외부 업체까지 조율해야 한다. 현수막업체, 조명업체, 음향업체, 의상대여업체 등등... 뭐 하나 알아서 되는 게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올해는 판데믹이 막 끝났다. 작년까지는 강당에 사람들이 모일 수 없었다. 그나마 올해 초부터 마스크를 쓰니 벗니 자율에 맡기니 했다. 대중교통에서 마스크 안 써도 된다고 한지 1년도 안 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끊겼던 명맥을 다시 이어야 하는 입장이다.
이게 무슨 문제냐고?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선생님들은 다들 학예회를 운영해 본 경험은 있지만, 현재 근무하는 '이 학교'에서는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연속 3년을 쉬었는데, 당연한 일이다. 교장선생님도, 교감선생님도, 업무담당자도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는 학예회를 안 해봤을 수 있다.
그러면 디테일을 알기 어렵다. 학생들은 어디서 입장에서 어디로 퇴장하는가? 음향업체는 컨트롤부스를 어디 차리는가? 옷은 어디서 갈아입는가? 이런 세세한 것은 보통 도제식으로 전수된다. 하지만 3년의 판데믹으로 명맥이 끊겼다. 이제 업무담당자인 내가 모든 걸 다시 세워야 한다. 물론, 다른 분들과 조율하는 건 필수다. 동료 선생님부터 관리자 분들까지, 끊임없이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맞다. 그래서 나는 올해 학급학예회를 하고 싶었다. 심지어 나는 이 학예회 업무만 맡은 게 아니다. 다른 업무도 주렁주렁 많이 달려 있다.(올해 초 업무분장 시, 나를 포함한 그 어떤 선생님도 이 업무를 희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여름방학쯤 전체학예회로 운영하기로 결정되었다. 일이 10배 더 늘었다는 뜻이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뇌를 비우고 즐기기로 했다.
솔직히 총각 시절에는 학예회의 존재 의미를 몰랐다. 안 하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5분짜리 학예회 무대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까? 부채춤, 리코더합주, 태권체조... 한 3시간 연습하면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 그대로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 적어도 한 달 전부터는 학예회 체제로 돌입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무조건 무대는 망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교육과정에 있는 건가? 당연히 학사일정에 '학예발표회' 일정은 잡혀 있다. 그거 말고, 연습에 들이는 시간 말이다. 솔직히 다른 교과나 창체 수업에 영향을 안 준다면 거짓말이다. 어떻게든 교육과정 재구성은 하겠지만, 아무튼 교과 공부에 영향을 주는 건 맞다.
그래서 총각 땐 싫었다. 수학 수업에 영향을 주는 게 싫었다. 국어 수업에 영향을 주는 게 싫었다. 다른 수업에 영향 안 주고 무대 만드는 게 교사의 역량 아니냐고? 글쎄, 그런 선생님도 계시겠지만 나는 그런 슈퍼맨이 아니다. 최대한 교과서에 나오는 걸로 무대를 꾸미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대처였다.(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그러니까 성취기준에도 없는 걸 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다르다. 어느새 나도 4살 아이를 둔 아빠가 되었다. 세계관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학예회 무대가 시작된다. 올해 나에게 선택지를 다시 준다면? 학급학예회랑 전체학예회 중에 뭘 고를지 기회가 생긴다면? 무조건 전체학예회다.
전체학예회, 크게 3가지 장점이 있다.
먼저, 보석들을 발견하게 된다. 교실에는 정말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담임에게 큰 힘을 주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눈에 더 안 띈다.
담임교사는 어떨 때 아이들 이름을 많이 부를까? 아이가 잘했을 때? 아니면 사고를 칠 때? 당연히 후자가 많다. 난간에 올라가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 옆자리 앉은 친구를 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수업 방해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 소리를 낸다. 그런 것에 눈이 팔리다 보면,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학생을 놓칠 수가 있다.
하지만 학예회 연습은 다르다. 이땐 오와 열을 맞추어 연습한다. 가려줄 책상과 의자가 없다. 그래서 평소에 못 보고 지나치던 학생을 볼 기회가 많다. 특히 발표조차 안 하는, 조용히 잘하는 친구들을 볼 수가 있다.
'저 친구가 저렇게 진국이었어?'
반복되는 연습에 지칠 법도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연습하는 친구가 있다. 교사 눈에는 그게 다 보인다. 물 마셔도 되냐느니, 화장실 가고 싶다느니, 이거 말고 다른 거 하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한다. 평소 수업 같았으면 놓칠 수도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럼 나도 묵묵히, 나이스에 행동발달사항을 적어준다.
두 번째 장점은 바로 성취감이다. 반의 모든 학생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왜냐고? 담임교사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히 학생들이 성공할 수 있는 과제만 제시한다. 게다가 학예회는 연말에 한다. 교사가 학생들 개개인의 특성을 다 파악했을 때다. 그러므로 무조건 성공하게 되어 있다. 반복만 하면.
물론 처음엔 누구나 다 힘들다. 학생들은 격하게 거부할 수 있다. 이걸 왜 해야 해요, 다른 거 하면 안 되나요? 라며 교사를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민중 봉기는 몇 주면 사그라든다. 아이들은 적응한다. 조금씩 발전하는 자기 자신을 본다. 학예회를 며칠 앞둔 날이면 그들도 놀란다. 스스로가 이걸 해냈다는 사실에 감동하는 거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걸 어디에서 느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때 아니면 언제 무대에 올라 보겠는가? 게다가 요즘은 더더욱 주인공 만들기에 신경 쓴다. 예전처럼 잘하는 아이들만 앞줄에 세우는 경우가 적다. 어떻게든 로테이션을 시킨다. 앞줄에 있던 아이들이 뒤로 가고, 뒤에 있던 아이들이 앞으로 나온다. 다들 맨 앞에 서 본다.
이건 경연대회가 아니다. 그냥 축제다. 잘하든 못하든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면 된다. 어차피 아이들은, 누군가에겐 주인공이다. 그게 엄마든, 아빠든,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센터장이든 간에 말이다. 나도 이제 마음을 좀 내려놓았다. 초임 땐 잘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냥 즐긴다.(오와 열 안 맞아도 마음 비운다는 뜻) 이 무대 월드클래스로 만든다고 해서 대통령표창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귀염둥이들이 한바탕 놀 수 있는 장만 마련해 주면 된다.
예전엔 선배 선생님들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체 학예회를 고집하는 분들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 아빠가 되고 나니 예전엔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인다. 아이들의 눈빛이 보이고, 보호자의 관심이 느껴진다. 학교의 존재 이유가 아이들과 학부모의 행복이라면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는 행사다.
아참, 정작 아이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학예회 공연 올라가는 거랑, 아예 안 하는 거랑 비교했을 때 뭐가 더 좋아요?"
"당연히 학예회가 더 좋죠"(한 명도 빠짐없이 이게 더 좋다고 함)
"왜요?"
"공부 안 하고 놀잖아요!"
(... 참고로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거 계속 시키고 있다. 태권체조와 품새, 태극 1장... 너희들 이거 노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