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째다. 길을 못 건너고 있다. 편도 1차로, 그러니까 왕복 2차로밖에 안 되는 길이다. 여길 건너야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런데 무리다. 차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안 서준다.
손을 들까? 발표하자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배웠지 않는가.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까지. 몸집이 커지기 전까진 손을 들었다. 길 건널 때 말이다. 하지만 나는 30대 중반이다. 175에 80이다. 손을 번쩍 들었다간 희한한 넘 되는 거다. 그냥 기다리자.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어라. 차들이 멈춘다. 그것도 끼이익 소리를 내며. 심지어 반대편 차로도 함께 멈춘다. 이게 무슨 일이람? 내 간절한 신호를 알아챈 겁니까? 의기양양하게 발을 내딛는다. '달달달' 이게 무슨 소리? 고개를 돌린다. 작고 소중한 바퀴가 눈에 들어온다. 흔히 말하는 '구르마'다. 그 안에 '검은 봉다리'가 가득하다. 그걸 미는 사람은? 등이 한껏 굽은 뽀글 머리 할머니었다. 뭐야! 이거 경로우대인가? 왜 나는 안 멈춰주고 이분은 멈춰주는데?! 유교 아직 사롸있네!
못 건너는 거. 그거 사실 내 책임이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우리 반 학생들에게 잔소리한 게 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불찰이다.
"여러분~ 횡단보도를 건널 땐 차가 없는 걸 확인하고 건너세요~"
바로 이 문장이다. 요놈 때문에 못 건너는 거다. 5분 동안 아무도 안 서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 같은 교사가 그리고 학교가 아직도 잘못 가르치고 있으니까.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법은 바뀐 지 오래다. 작년 여름부터 시행되었다. 신호 없는 횡단보도에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가 있다면 일단 멈춰야 한다. 지나가면 안 된다. 사람이 먼저다. 차는 그다음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은 다르다. 아직도 불법(?)을 가르친다. 개조식으로 적어보자면
1. 여러분~ 횡단보도에선 일단 멈추세요~
2. 좌우를 꼭 살피세요~
3. 높은 차가 못 볼 수 있으니, 손을 들어주세요~
(이까진 좋다 이거다)
4. 차가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너세요~
마지막 멘트가 문제다. 차가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니.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학생들은 훗날 보행자에서 운전자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몬 진화!
말을 뒤집자. 차가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 운전자의 해석본은 이렇다. '나는 일단 지나갈게요~ 차 안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라고 봐도 된다. 이 문장에는 운전자의 의무가 빠져 있다. 일시정지 의무 말이다.
학생들, 말을 잘 듣는다. 기다리라면 끝까지 기다린다. 왜냐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리고 진화한다. 보행몬에서 운전몬으로 말이다. 그때 횡단보도를 만나면? 당연히 씽 지나갈 수밖에 없다. '보행자님, 나도 옛날엔 다 기다렸어요. 님도 학교에서 배웠죠? 기다리세요.'라고 생각할지도.
학교도 확 바꾸라고? 법이 바뀌었으니 그대로 적용하라고?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레알 현실 월드를 살아가려면 타협이 필요하다. 법제처에 고시된 걸 그대로 따랐다간? 쾅쾅쾅 연쇄추돌 각일지도.
(법전) 운전자, 보행자, 횡단보도. 성공적
(레알트루현실월드) 폰 보는 운전자, 갑자기 뛰어드는 보행자, 희미해서 자국도 안 남은 횡단보도, 안전거리 유지 안 하는 뒤차. 끄아아
타협이 필요하다. 테슬라보다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내야 한다. 차를 무턱대고 멈추게 할 순 없다. 뒤차가 똥꼬를 찌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전거리 유지 안 하는 차들 은근 많다. 그것까지 내가 통제할 순 없잖아. 어쨌든 사고 안 내는 게 핵심이다. 그럼 절충안은? 교육자로서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쳐야 할까?
"차가 멈추면 지나가세요."
드디어 찾았다. 마법의 문장이다. '차가 모두 지나가면'이라는 조건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미래에 운전몬으로 진화하더라도 걱정 없다. 일단 '차를 멈춘다'라고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변수도 대처된다. 안 멈추는 운전자도 분명 있다. 그럼 어쩌겠는가? 보행자가 기다려야지.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이 넘는다. 법이 바뀐 걸 아직 모르는 분도 계실 거다. 알고도 지나가는 마이웨이 분들도 계실 거고. 목숨은 하나다.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질 필요는 없다. 그러다 멈춰주는 차를 만나면? 간단한 목례와 함께 건너면 된다.
속이 뻥 뚫린다. 문장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제대로 가르치는 느낌이 든다. 이 친구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운전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땐 5분 안 기다려도 되겠지? 헤헤.
2023년. 다시 차에 탄다. 나도 운전자가 된다. 신경이 곤두선다. 한*철tv에 나오고 싶지 않다. 횡단보도가 보인다. 보행자 유무를 살핀다. 멀리서 아이가 뛰어온다. 급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법에 적힌 대로? 여기서 밟았다간 뒤차가 날 때려박을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갈까? 뛰어오는 속도를 보니 내가 더 빨리 지나갈 것 같은데? 아오 근데 이거 범법인가?
에라이! 빨리 자율주행시대가 왔으면 좋겠다.